[칼럼]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놀라운 변화, 보고타패션위크'
5월 19일 새벽, 나는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제8회 보고타패션위크(Bogotá Fashion Week)에 VIP 바이어로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이 2019년에 이어 두 번째 받은 초대였다.
문제는 직항 항공편이 없어서 미국을 경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인천공항을 떠나 보고타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24시간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장시간 비행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내게는 만만치 않은 일정이었다. 그런데 출발 전부터 진이 빠질 수밖에 없는 해프닝까지 겹쳤다. 비행기 티켓을 제공해 주기로 한 초대 측의 그야말로 ‘콜롬비아스러운’ 느긋한 대응 때문이었다.
원래 5월 17일에 출발하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초대 측이 16일까지도 항공권을 보내오지 않는 게 아닌가. 간신히 17일 저녁에 이메일을 받았지만 웬걸, 예약된 항공편 정보가 잘못돼 있었다. 결국 부랴부랴 일정을 조정해 패션위크 개막일인 19일 새벽 비행기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초대받은 VIP 바이어의 항공 일정을 마지막 순간에 제대로 잡아주다니,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실 나는 지난 10여 년간 콜롬비아 사람들과 함께 일해 왔고 콜롬비아에 관한 책도 두 권이나 썼을 만큼 그들의 시간 관념과 업무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비행 일주일 전까지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좀 심했다. 출발 직전에야 간신히 비행기표가 확보되는 일련의 상황에 ‘아, 이 얼마나 콜롬비아스러운 프로세스인가!’ 하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출국 전에 아쉬웠던 점은 또 있었다. 200개에 달하는 참가 브랜드 정보를 미리 살펴보고 관심이 가는 10여 개 브랜드와 미팅 약속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정작 공식 웹페이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사전에 간단하게나마 ‘관심 브랜드를 몇 개 추천해 주겠다’는 식으로라도 준비가 됐더라면, 미리 어느 브랜드에 주목해야겠다는 계획을 갖고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6년 전에도 한 차례 BFW를 직접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솔직히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액세서리 디자인은 남미 특유의 열정을 한껏 표출한 듯 색감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볼드해서 한국 소비자 정서에는 맞지 않았다. 기성복(Ready-to-Wear)은 과연 RTW라는 개념이 있긴 한 건가 싶을 만큼 수준이 낮았다. H&M과의 협업으로 이름을 알린 콜롬비아 디자이너 요한나 오르티스의 브랜드조차 색채가 지나치게 강렬하고 드레스 위주여서 실용성이 떨어졌고,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당시 내 마음에 쏙 든 카테고리가 있었다면 수영복과 리조트웨어였다. 콜롬비아 ‘PQ’라는 스윔웨어 브랜드는 영국 헤롯 백화점과 뉴욕 삭스 피프스 애비뉴에서도 바잉할 정도로 컬렉션의 완성도가 높고 가격 경쟁력도 뛰어났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이전에 서울 갤러리아백화점 팝업스토어에서 두 개 레일 가득 상품을 전시하고 한 달 동안 판매했는데, 월 매출 4000만~5000만원을 올리기도 했다. 디자인이 세련되고 가격도 적당해 한국 고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리조트에서는 좀 화려하게 입어도 좋고 어차피 한두 시즌 입는 옷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옷의 품질이 아주 좋지 않아도 가격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PQ의 수영복과 리조트웨어는 이러한 조건을 두루 갖춘 데다 이미 국제적으로도 인지도 있는 브랜드라서 일 처리 방식도 아주 칼 같고 납기일 준수도 정확했다. 한마디로 전혀 ‘콜롬비아스럽지 않은’ 모범생이었다.
올해 BFW에서도 예쁜 스윔웨어 브랜드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컬러풀하고 영(Young)한 감성이 톡톡 튀는 ‘마지(Maaji)’, 가족이 모두 맞춰 입을 수 있는 패밀리룩 수영복을 선보인 ‘아구아마리아(Agua Maria)’, 패턴이 고급스럽고 독특한 디자인의 ‘아구아벤디타(Agua Bendita)’ 등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스윔웨어나 리조트웨어 분야만 놓고 본다면 디자인이나 색감, 가성비 면에서 콜롬비아 브랜드들이 단연 최고 수준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올해 BFW에는 수영복과 리조트웨어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들이 대거 참여했다. 귀여운 스타일의 RTW 브랜드들, 품질 좋은 메탈릭 실 소재의 수공예 니트 백(니트로 뜨개질한 가방) 브랜드들, 트렌디한 액세서리 브랜드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6년 전 BFW의 수준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 발전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SNS 발달로 전 세계의 정보와 트렌드를 실시간 접할 수 있게 된 덕분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다소 현지 취향에 머물렀던 콜롬비아 브랜드들이 이제는 국제적인 시각을 갖추기 시작한 듯했다. 디자인이나 색채 면에서 콜롬비아만의 매력을 간직하면서도 글로벌 취향을 슬기롭게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출발 전에 겪은 일련의 스트레스풀한 사건들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막상 보고타에 도착하고 나니 이후 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숙소로 마련된 힐튼호텔은 패션쇼와 트레이드쇼 장소에서 가까웠고 호텔 시설도 아주 훌륭했다. 보고타 시내에서의 이동 또한 약속 시간에 정확하게 맞췄고 차량도 편안하고 안전했다. 8회째를 맞이한 보고타패션위크의 전반적인 운영 수준은 그야말로 일취월장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향상돼 있었다.
그동안 콜롬비아 업체들과 비즈니스를 맺으면서 가장 애를 먹었던 것은 역시 느긋한 남미식 시간 관념이었다. 납기일을 제때 지키지 않는 것은 예사이고, 이메일 답장은 엄청나게(!) 느린 데다 내용도 부정확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몇몇 액세서리 브랜드와 아기자기한 RTW 브랜드들은 규모는 작지만 이미 여러 나라에 수출을 해서인지 연락도 빠르고 업무 추진도 척척 진행되는 모습이었다.
요즘은 SNS 발달로 모든 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지면서 콜롬비아인들도 적어도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많이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마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주인공 플로렌티노가 평생 기다림 끝에 사랑을 이루듯이 콜롬비아인들에게도 기다림의 미학이 몸에 밴 건 아닐까 하는 농담을 해본다.
한편으로 국내 패션 업계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나라 컨템퍼러리 패션 마켓은 그동안 프랑스 브랜드 일색이었다. 전 세계 바이어들이 파리 패션위크에 몰려가고, 파리가 패션 수도로 통하니 어느 정도 당연한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컨템퍼러리 존에는 큰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오랫동안 많이 소개된 프랑스 브랜드들이 이제는 다소 식상해졌고, 판매 실적이 줄어드는 것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파리나 밀라노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보고타를 비롯해 호주나 독일 등 세계 각지에 숨어 있는 진주 같은 브랜드들을 발굴하러 나설 때가 아닐까. 머지않아 국내 바이어들이 파리패션위크 대신 보고타패션위크로 향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결국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라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 콜롬비아의 대문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말처럼 이번 보고타 여행도 처음의 진통 대신 얻은 성과와 즐거움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끝으로 꿀팁 하나. 혹시 앞으로 보고타패션위크를 방문할 바이어가 있다면 절대로 현지에서 빨리 걷거나 뛰거나 격렬한 운동을 하지 말라. 보고타는 해발 2640m의 고원도시라서 비행기로 도착할 때는 잘 느끼지 못해도 갑자기 무리하면 고산증에 시달릴 수 있다. 실제로 나도 그 사실을 깜빡 잊고 호텔 피트니스 센터에서 러닝머신으로 속보 운동을 했다가 심한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니 높은 곳에서는 ‘천천히!’가 철칙이다.
이번 보고타패션위크가 여러모로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는 소식을 들으니 콜롬비아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또 패션인으로서 더없이 뿌듯하다. 게다가 출장의 보너스로 지파키라 소금광산의 장엄한 지하 소금 대성당, 콜롬비아의 거장 보테로의 작품들이 가득한 보테로 박물관, 엘도라도의 전설을 간직한 황금박물관, 몬세라테 언덕에서 내려다본 보고타의 비경까지 둘러볼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만족스러운 패션 오디세이인가!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5년 8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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