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멀티숍 이야기(3) 누가, 왜 이윤도 없는데 해야만 할까?'
지난호에 이어 반드시 멀티숍이어야만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최고의 ‘샘플실’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옷을 파는 공간’이 아닌, 시대를 이끄는 브랜드들이 현실화한 아이디어와 옷의 실루엣 · 색감 · 소재 · 기조를 가장 가까이서 마주하고, 만지고, 입어 보며 자사 브랜드의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인사이트의 현장이 바로 멀티숍이다.
현대로 주인이 바뀌기 전 한섬이 운영하던 전설적인 멀티숍 ‘스페이스 무이’가 그 좋은 예다. 이름부터 존재감이 남달랐던 무이는 발렌시아가 · 끌로에 · 지방시 · 랑방 등 당시 한섬이 독점으로 운영하던 브랜드들을 전시하듯 배치하고, 자사 브랜드인 타임 · 마인 · 시스템 · SJSJ를 위한 샘플실로 활용했다.
초기에는 명품 브랜드들의 옷을 정가로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샘플비만 해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멀티숍을 오픈하면서부터는 홀세일 가격에 구매할 수 있게 돼 정가로 한 벌 살 돈을 홀세일가로 세 벌을 사서, 그중 한 벌은 과감히 해체해 디자이너들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나머지 두 벌은 다시 멀티숍에서 판매하는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구조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정가로 샘플을 구입할 수 있는 때는 시즌이 이미 시작된 이후, 빨라도 한참 늦은 시점에서야 가능하다. 하지만 홀세일 바잉은 다르다. 시즌이 도래하기 6개월 전 패션위크 현장에서 어떤 컬러가 유행할지, 어떤 실루엣이 주를 이룰지, 어떤 브랜드가 새 물결을 일으킬지 트렌드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무이의 플래그십스토어 2층에 디자인실이 함께 있었다는 점은 이 멀티숍이 단순한 ‘판매 공간’이 아니라 ‘샘플실’로 기능했다는 해석에 강력한 신빙성을 부여한다.
이뿐만 아니라 멀티숍을 운영하려면 전 세계의 브랜드를 끊임없이 찾아봐야 한다. 전시회장을 직접 누비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직접 입어 봐야 한다. 전 세계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와 마주하는 것과도 같은 이 과정은 디자인을 하는 입장에서는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디자이너들은 평균 5~7년이 지나면 창작의 고갈을 느낀다. 브랜드 이직률이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바이어와 짝을 이뤄 바잉 현장을 함께 다닌다면 얘기가 다르다. 시즌마다 새로운 자극과 생생한 트렌드의 세례를 받게 된다. 영감이 메말라 버릴 틈이 없다.
이런 이유로,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브랜드를 보유한 패션 기업이라면 작게라도 반드시 멀티숍을 운영해야 한다. 그 공간이야말로 시즌 전의 글로벌 트렌드를 체감하고, 브랜드 생명력을 연장할 수 있는 창의의 온실이기 때문이다.
분더샵이나 무이 같은 럭셔리 멀티숍은 브랜드 사업을 위한 인큐베이터이자 시대를 앞서는 패션 얼리어답터 고객을 위한 쇼룸이자 자사 브랜드를 위한 샘플실이다. 단순한 수익 창출 목적으로 이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변화무쌍한 패션의 생태계를 선도하고 감각을 자극하는 플랫폼으로의 역할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럭셔리 멀티숍은 그 자체로 수익을 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다. 파리의 콜레트, 도쿄의 10꼬르소꼬모 같은 전설의 편집숍들도 결국 운영상의 문제로 문을 닫았다.
멀티숍의 지속가능성: 톰그레이하운드와 비이커의 해법
수입 브랜드 바잉의 한계 : 새로운 돌파구 필요해외 디자이너 브랜드를 큐레이션해 선보이는 편집숍은 한때 혁신적인 유통 모델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지지난호에서 밝혔듯이 수입 브랜드 바잉만으로 운영될 경우 여러 면에서 수익성이 제한된다. 인기 브랜드에 의존하면 다른 매장과의 차별화가 어렵고, 동일한 브랜드를 취급하는 백화점이나 온라인몰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환율 변동이나 수입 절차에서 발생하는 비용 역시 리스크다. 요컨대 남의 브랜드만 팔아서는 꾸준한 성장에 한계가 있다. 실제 일본의 셀렉트숍 기업 유나이티드애로우즈도 초창기에는 구매 브랜드 위주로 운영했으나, 이후 자체 상품 비중을 높이는 SPA 전략을 도입해 수익 구조를 개선했다. 엄선한 디자이너 브랜드로 고객을 끌어들이되 자체 브랜드로 높은 수익성을 확보하는 이중 전략은 현재 유나이티드애로우즈를 일본 최대 규모의 편집숍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 됐다.
멀티숍의 브랜드화: 매장이 곧 브랜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편집숍 자체를 하나의 브랜드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톰그레이하운드와 비이커는 편집숍의 브랜드화를 선도하는 아주 훌륭한 사례다. 톰그레이하운드는 한섬에서 2010년대 중반 선보인 멀티숍으로, 신진 디자이너들과 실험적인 스타일을 큐레이션하며 자체적인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했다. 그 결과 파리 마레 지구에 지점을 열어 글로벌 무대에서도 10년 동안 이름을 알리며, 편집숍 이름 자체가 신뢰도의 상징이 됐다. 이곳은 그동안의 현지 판매 반응과 검증을 거쳐 한섬의 자체 브랜드인 시스템의 단독 플래그십으로 작년 6월 전환했다.
프랑스 대표 콘셉트스토어 메르시는 패션부터 가정용품, 서적, 카페까지 아우르는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며 2009년 1호점 성공 후 2025년 2호점을 열 만큼 자체 브랜드 파워를 키웠다. 이제 소비자들은 편집숍을 단순히 여러 브랜드가 모여 있는 매장이 아니라, 독자적인 취향과 문화를 제안하는 브랜드로 인식하고 있다. 앞으로는 멀티숍이 장기적으로 충성 고객층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매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자체 제작 라인의 힘: 높은 마진과 차별화
편집숍의 수익성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자체 제작 상품, 이른바 PB나 컨템퍼러리 라인의 도입이 필수적이다. 앞서 언급한 일본 편집숍들은 이미 오래전에 자체 브랜드의 중요성을 증명했다. 예를 들어 빔스는 무려 30개 이상의 자체 레이블을 운영하며 각기 다른 콘셉트의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오리지널 라인은 빔스 매장 내에서만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희소성과 충성도를 높여 주며, 외부 브랜드를 판매할 때보다 높은 마진을 낼 수 있었다. 투모로우랜드도 창립자 사사키 히로유키가 ‘우리 스스로 만든 제품을 우리 가게에서 판다’라는 철학 아래 10여 개의 자체 브랜드를 전개해 왔다. 그 결과 투모로우랜드는 경쟁이 치열한 일본 시장에서도 견고한 입지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삼성물산에서 운영하는 비이커가 자체 라인의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2012년 론칭 이후 ‘컬처 블렌딩 유니언’이라는 슬로건 아래 다양한 글로벌 브랜드를 큐레이션해 왔지만, 최근에는 자체 기획 상품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비이커는 2020년대 초반 연매출 1000억원 규모로 성장했고, 코로나19 시기에도 두 자릿수 매출 성장을 보였는데, 그 배경에는 PB 상품 중심의 기획력이 있었다. 특히 2020년 밀레니얼세대를 겨냥해 선보인 온라인 전용 자체 브랜드 ‘B_(비언더바)’ 라인은 트렌디한 유니섹스 스타일의 PB 상품을 기존 가격 대비 60% 수준으로 책정해 화제를 모았다. 가성비와 트렌드를 겸비한 자체 제작 라인은 신규 고객 유입과 매출 증대의 일등공신이 됐다. 최근에는 자체 데님 전문 브랜드 ‘스티치컴스블루’를 론칭해 고품질 진 라인으로 30대 고객층을 겨냥하며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있다. 자체 제작 상품은 멀티숍에 든든한 수익률 방석이자 브랜드 정체성을 굳혀 주는 무기가 되고 있다.
결론: 큐레이션을 넘어 창조와 공감으로
변화하는 시장 속에서 멀티숍이 살아남으려면 큐레이션을 넘어 크리에이션으로 나아가야 한다. 톰그레이하운드와 비이커를 비롯한 국내외 편집숍들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편집숍 자체를 하나의 브랜드로 키우고 자체 제작 라인으로 수익성을 보완해 영리한 머천다이징과 고객 경험 강화로 충성도를 얻는 것이 지속가능한 수익 모델의 핵심이다.
멀티숍은 유행의 최전선에 서 있을수록 최신 트렌드를 빠르게 읽고 대응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진정성 있는 기획과 꾸준한 혁신으로 고유한 색깔을 지켜 나간다면 편집숍은 단순한 브랜드 모음집을 넘어 하나의 문화적 플랫폼으로 지속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5년 7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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