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월드타워 에비뉴엘과 버킨백 이야기'

패션비즈 취재팀 (fashionbiz_report@fashionbiz.co.kr)
25.01.03 ∙ 조회수 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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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월드타워 에비뉴엘과 버킨백 이야기' 27-Image


<알렉산드르 푸시킨(번역 김정아)>


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НЕ ПЕЧАЛЬСЯ, НЕ СЕРДИСЬ !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В ДЕНЬ УНЫНИЯ СМИРИСЬ

슬픈 날들은 참고 견뎌라

ДЕНЬ ВЕСЕЛЬЯ, ВЕРЬ, НАСТАНЕТ

믿어라, 즐거운 날이 오리라는 것을

 

СЕРДЦЕ В БУДУЩЕМ ЖИВЁТ

마음은 미래에 살고

НАСТОЯЩЕЕ УНЫЛО

현재는 음울한 것

ВСЁ МГНОВЕННО, ВСЁ ПРОЙДЁТ

모든 것은 찰나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ЧТО ПРОЙДЁТ, ТО БУДЕТ МИЛО.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이 시의 첫 두 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뒤의 구절이 어떤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살면 살수록 2연의 마지막 두 구절은 진리 그 자체임을 느끼게 된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고 힘겹기만 해서, 버텨낼 수 없을 것만 같던 그런 날들이, 훗날 돌아보면 아름답고 아련하게 느껴지는 그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 말이다.


왜 뜬금없이 푸시킨의 시를 인용했는가 하면, 지난해 10월 ‘너희들이 버킨 맛을 알아?’라는 이재경 칼럼니스트의 원고가 그 많던 나의 버킨백이 다 사라지게 된 웃픈 추억을 소환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렇게도 힘들고 죽을 만큼 힘들었던 열 달이 이제는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됐기에 푸시킨의 이 시가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다. ‘너희들이 버킨 맛을 알아?’라는 지난 칼럼에 대한 답을 하자면, 나는 버킨 맛을 안다. 그것도 색상별로, 크기별로 다 안다. 좀 과장하자면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구할 수 있다는 이 버킨백을 내가 이렇게나 많이 갖게 된(과거형임에 주의하시길!) 사연은 이렇다.


나의 첫 번째 매장인 ‘스페이스 눌’ 플래그십스토어는 도산공원에 있는 에르메스 플래그십 스토어 바로 뒤에 있었다. 그때 에르메스에서 일하던 판매원들이 스페이스 눌의 옷을 몹시 좋아했다. 나는 일 년에 두 번 진행하는 정기 패밀리 세일을 시작하기 직전에 친한 에르메스 판매 직원에게 먼저 알려서, 하루는 매장 문을 닫고 에르메스 직원들이 방문해 좋은 것들을 선점하게 해줬다. 이건 원가가 비싸서 사는 게 남는 것이라는 둥 바이어로서의 기밀까지 누설해 가며 그들이 좋은 물건을 골라가게 도왔다. 그래서 몇몇 직원과는 친구처럼 지낼 정도로, 가끔 점심도 같이 먹는 아주 친한 사이가 됐다.


최근 7년 전부터 정책상 웨이팅 리스트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15년 전에는 웨이팅 리스트가 있었다. 예를 들어 “30㎝ 뱀부 그린(bambou green), 토고(Togo), 금장을 원하는 데 들어오면 알려 주세요”라는 식으로 웨이팅을 거는 거다. 이렇게 원하는 딱 맞는 아이템이 들어올 확률은 로또를 10번 맞을 확률보다 적기에 대체로 25㎝·30㎝·35㎝ 버킨, 또는 28㎝·32㎝ 켈리로 가방 크기만 얘기하거나 또는 색상만 얘기하고 기다린다. 이 웨이팅 리스트는 판매 직원들의 수첩에 수기로 적혀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 순위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나는 친한 직원에게 크기와 색상 관계없이 들어오는 대로 먼저 알려 달라고 요청해서 다양한 크기와 색상의 버킨백과 여러 개의 켈리백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패션이란 세계에 몸담게 된 첫 2~3년간 있었던 일이다. 지인들에게 입버릇처럼 늘 하는 말이지만,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이렇게 ‘부-자’였다.


누구에게나 시행착오는 있는 법. 사업 첫 몇 해 동안 많은 돈을 까먹고 있던 차에 2014년 3월 월드타워 에비뉴엘이라는 멋진 곳이 오픈한다며 2013년 롯데 바이어들이 스페이스 눌을 입점해 달라고 찾아왔다. 당시 내가 운영하던 스페이스 눌에는 20여 개의 브랜드가 있었기 때문에 매장 크기도 일반 매장의 2배를 제시했고, 롯데가 직영으로 하는 편집숍 ‘5 on the Go’에도 우리가 진행하는 브랜드 중 ‘데바스테’와 ‘데이드림 네이션’ 등 3개의 브랜드를 메인 브랜드로 입점해 달라고 나에게 요구했다. 또 롯데의 데님 편집숍에는 두 개의 액세서리 브랜드를 넣어 달라고 했다. 나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 제안 모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건물과 건물 내부의 청사진은 감동적일 정도로 아름다워서 나는 이 제안이 매우 감사했다.

2014 S/S에 거의 두 매장을 꽉 채울 만한 바잉을 야심 차게 해뒀다. 수입 물품들이기에 6개월 전에 미리 오더도 넣어뒀다. 그런데 오호통재라! 2014년 3월에 오픈하기로 했던 월드타워 에비뉴엘은 2014년 10월 30일에야 오픈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때의 입점 예정 업체들은 뼛속 깊이 알 것이다. 서울시와 롯데가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3월에 예정돼 있던 오픈이 10월로 연기된 것이다. 한마디로 2014 S/S 바잉 물량은 그대로 재고로 남게 됐고, 2014 F/W도 판매 시기를 거의 놓친 상태에서 오픈하게 된 것이다.


롯데도 사정이 있었겠지만 S/S 오픈이 불가하다는 것을 미리 입점 예정 업체에 알렸더라면, 팝업이나 행사를 통해 어떻게 해서라도 물량을 소진했을 텐데 3월 10일, 4월 15일, 5월 7일 이런 식으로 오픈 예정일이 한 달씩 미뤄져서 물량 소진의 기회조차 다 잃고 말았다. 바잉한 것을 팔지 못해 명품 보관 가능한 창고료만 수천만 원이 나왔다. 월드타워 에비뉴엘 5층은 층고가 높아서 공사하는 인부들이 인슐레이티드 부츠를 신고 안전에 대한 교육도 이틀씩 받아야 하고, 모든 안전 수칙을 과할 정도로 지켜야 했다. 그러다 보니 공사를 하려 하는 업체도 적었고, 공사비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었다.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말이지 이래서 사람들이 죽는구나 싶었다. 긍정 마인드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나 같은 오뚝이도 쓰러져서 일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매일 아침 자전거로 한강 변을 달리며, 저 멀리 올라간 무심하게 아름다운 123층 건물을 볼 때마다 자전거와 함께 한강으로 곤두박질치고 싶었다. 직원들의 급여일이 다가올 때마다 나는 명품 중고숍 구구스에 전화를 걸었다. 구구스 출장 직원이 집으로 와서 내 버킨백 중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색과 사이즈를 두어 개씩 찜하면 그 자리에서 내 계좌로 돈이 들어왔다. 나는 그 돈으로 직원들 급여를 줬다. 그래도 슬프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돈이 제법 있을 때 이렇게 버킨백을 사 뒀던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싶었다. 나는 한 달에 2~3개의 버킨백을 팔면서 7개월을 버텼다.


나의 아름다운 버킨백은 이렇게 월드타워 에비뉴엘의 오픈과 함께 전부 과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슬프지도 아깝지도 않았다. 나를 한 뼘 더 단단하게 해준 경험에 대한 값을 치른 거라고 여겼다. 그때 다 같이 아픔을 겪었던 많은 중소기업 사장님에게는 정말로 진심 어린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러시아의 천재 시인 푸시킨 말대로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오늘은 음울하고 슬프고 힘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심장은 미래를 보며 살고, 즐거운 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야 한다. 음울하고 슬픈 날이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것이 가슴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삶이 커다란 장애를 내 앞에 가져다 놓으면 처음엔 울고불고 야단을 하지만, 다음 날이면 언제나 오뚝이처럼 불쑥 일어나 삶이 내게 준 장애를 신이 나를 사랑하기에 보내 준 선물이라 여기며 기꺼이 보듬어 낸다. 고리타분하게도 권선징악을 믿으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복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태산만 한 장애가 내 앞에 떡 버티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벌받을 짓을 한 적이 별로 없으니, 벌이 아니라 선물일 수밖에 없다고 자위한다. 이렇게 바보스러울 정도로 억척스러운 삶 예찬론자가 됐다. 뼛속까지 인문학자인 내게 패션계에서의 삶은 그만큼 고단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 삶을 두 팔 벌려 보듬어왔고, 계속 그렇게 살련다. 또 한 명의 천재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할 뿐”이라고.


■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5년 1월호에 게재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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