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대기업 ‐ 중소기업 간 숨 막히는 재계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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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 소개한 이탈리아 브랜드 ‘넘버 21(N°21, 넘버투애니원)’에 대해 되짚어 보자. 2010년 알렉산드로 델라쿠아(Alessandro Dell'Acqua)가 론칭한 이 브랜드는, 다음 해 세계적인 이탈리아 쇼룸인 ‘리카르도 그라시(Riccardo Grassi)’와 계약을 맺고, 2012년 그 뒤에 있는 펀드의 힘을 받아 컬렉션의 규모가 훨씬 커졌다.
컬렉션 자체도 훨씬 예뻐지고 다양해졌기 때문에, 누가 파트너가 되더라도 잘될 듯한 브랜드라고 말한 바 있다.
첫 번째 행운의 주인공이 된 우리나라 파트너사는 ‘LF’였다. LF는 넘버 21과 독점 계약을 맺은 후 2014년에 국내 주요 백화점에 매장을 오픈했고, 처음에는 예상대로 순항했다. 넘버 21이 모노브랜드 매장 론칭 전 2~3년에 걸쳐 국내 주요 멀티숍에는 다 들어가 있었고, 얼리어답터 패셔니스타들에게는 이미 알려진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임이 잦은 강남 엄마들 또는 국제학교 엄마들 사이에도, 목덜미 뒤로 무심한 듯 흘러나오는 핑크빛 라벨이 “나 옷 좀 입거든” 하는 것을 얘기하듯 엄마들의 유니폼처럼 돼갔다. 이렇게 아무 문제없이 순항할 것만 같았던 국내 N21에 어느 날 갑자기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넘버 21과 LF와의 5년 계약이 끝나가는 시점에 ‘리앤한’이라는 중소기업이 국내 독점판매 계약권을 가져 간 것이다. 리앤한은 원래 ‘한스타일’이라는 멀티숍을 중심으로 ‘이자벨마랑’ ‘바네사브루노’ 등을 전개하던 작은 회사였으나, 재력가 집안과의 결혼을 통해 대기업에 버금가는 자금력을 갖게 됐다.
LF 입장에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겠지만, 필자가 앞서 누누이 강조했던 이탈리아인의 특징을 알았더라면 2중, 3중의 안전장치를 하고 특히 재계약 시점에서는 더 조심했어야만 했다. 브랜드와의 계약은 통상적으로 5년이고, 3개월 전 혹은 6개월 전 서면으로 종료 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대개 자동으로 갱신된다.
LF는 국내 유통망을 차근차근 잘 넓혀 왔고, 다른 대기업이 덤비지는 않을 테니 자동 계약 갱신하는 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여러 브랜드의 전 세계 판권을 가진 멀티 라벨 쇼룸 리카르도 그라시였다. 넘버 21 단일 브랜드의 미니멈만을 생각한 LF와 달리, 리앤한은 리카르도 그라시가 키운 컨템퍼러리 브랜드 ‘MSGM’과 럭셔리 RTW 브랜드인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독점권을 함께 제안했다.
이 말은 곧, LF가 바잉하기로 한 미니멈보다 더 큰 미니멈을 함께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거래의 경우, 한 곳과 거래해도 세 회사와 거래하는 것과 동일한 총액을 받을 수 있다면 훨씬 효율적이다.
원래 이탈리아 브랜드는 세트딜을 선호하는 편이다. 브랜드의 상위 또는 하위브랜드가 같이 있으면, 그 브랜드들의 미니멈을 함께 제시하며 같이 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강권한다. 그러니 여러 개의 브랜드를 커다란 미니멈으로 바잉하겠다고 제시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계약을 뺏긴 후 LF는 대기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행태를 보여줬다. LF는 리앤한이 백화점에 넘버 21 모노 매장을 못 열도록, 리앤한을 상대로 국내 판매 금지 소송을 걸었고, 백화점 바이어들에게 읍소와 반 협박(?)을 했다. 대기업의 행태가 맞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고, 패션계 일원으로서 슬픈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LF에 실망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정작 자신들은 중소기업으로부터 브랜드를 뺏는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왔기 때문이다. ‘막스마라’ ‘핏플랍’ 등 당시 중소기업의 밥줄이었던 브랜드를 LF가 넘겨 받아 지금까지 전개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대기업이라면 부디 ‘큰형님’으로서 중소기업이 목숨 걸고 전개하는 브랜드는 건드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게 상생 아닌가! 2012년 호텔신라는 열성을 다해 키운 베이커리 ‘아티제’가 골목 상권 침해라는 논란에 휩싸이자 당장 매각했고, 가능하면 F&B 사업은 하지 말라는 지시를 계열사에 내렸다고 한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그래, 저게 큰형님의 태도지!’라고 감탄했다.
이런 일들이 하나하나 쌓여 기업 이미지가 된다. 최소한 ‘사업은 사업이다’라는 철학으로 중소기업의 뒤통수를 친 전적이 있다면, 반대로 자신이 뒤통수를 맞았을 때도 겉으로는 의연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는 게 일관성이고,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LF가 일으킨 사건이 있었기에 리앤한이 넘버 21을 잘 전개하길 기대했다. 그런데 웬걸? 리앤한은 브랜드를 마치 장기판의 졸처럼 사용해 버렸다. 인터넷 비즈니스에 총력을 기울이다 보니, 온라인 쇼핑몰인 ‘한스타일’의 트래픽을 올려야 했고, 이때 가장 쉬운 방법이 가격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독점 브랜드의 가격을 파격적으로 낮추다 보니 오프라인과의 격차가 심해져, 백화점 매장이 하나둘씩 철수하게 됐다. 결국 넘버 21도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준명품 수준의 예쁘고 고급스러운 티셔츠를 집에서 잠옷으로 입을 정도의 가격으로 팔았으니, 소비자로서는 눈물 나게 좋은 기회였지만 넘버 21을 사랑하고 알렉산드로 델아쿠아의 히스토리를 아는 나로서는 가슴이 아팠다.
게다가 브랜드 이미지와 맞지 않는 라이선싱 제품까지 온라인에 도배돼 안타까웠다. 결국 2023년 리앤한은 MSGM, 지암바티스타 발리와 함께 넘버 21도 재계약을 못했다.
한편 2024년 FW 시즌부터 ‘코오롱’이 넘버 21의 국내 세 번째 독점 파트너사가 돼 모노 브랜드 스토어를 백화점에 다시 론칭한다. 부디 코오롱이 이전 두 국내 파트너사의 사례를 참고해서 이 예쁜 브랜드를 고이고이 더 멋있게 키워 주기를 바란다. 코오롱 수입 담당자를 전에 만났는데, 브랜드에 대한 식견도 높고, 애정도 있고, 책임감도 남달라 보였다. 드디어 넘버 21이 제대로 된 국내 파트너를 만난 것 같아 기대된다.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 스토리(RHK)
· 패션MD : Intro(RHK)
· 패션MD1 : 바잉편(21세기 북스)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칼럼제목 : 도스토옙스키 문학으로 본 21세기)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4년 7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패션비즈는 매월 패션비즈니스 현장의 다양한 리서치 정보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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