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⑮ - 이탈리아편 Ⅳ'
‘롯데와 에르노(Herno)라고?’ 이 조합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롯데는 한 번도 에르노의 바이어였던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2014년 겨울, 롯데에서 나에게 ‘현재 명동 에비뉴엘 3층 에스컬레이터 앞자리에 에르노 모노 매장을 오픈해 달라’고 제안했다. 당시 어카운트는 신세계, 현대, ‘스페이스 눌’이었으니, 그 제안이 나에게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2013년 F/W에 갤러리아가 낮은 마크업으로 에르노를 매우 싸게 파는 바람에 매우 힘겨웠다고 앞서 말한 바 있다(‘에르노 전쟁 1탄’ 참조). 만약 여기에 내가 모노 매장을 오픈했는데 바로 옆에 있는 신세계에서 또 낮은 마크업을 하면, 그 피해는 내가 감당하기에 버거웠을 것이다. 또한 나 혼자서는 독점 제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에르노의 국내 마켓이 커지고 있어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사했더니, 바이어는 대신 신세계에 그 자리를 제안하겠다고 했다. 신세계는 신세계 어카운트, 롯데 전체의 어카운트, 갤러리아 어카운트까지 다 가져가게 되면서 독점 파트너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명동 에비뉴엘의 로케이션에 오픈한다는 의미는 롯데 전체의 어카운트를 신세계가 가져간다는 뜻이 된다.
신세계는 에르노 및 해외 브랜드 다수의 훌륭한 파트너다. 현대는 한섬을 인수하며 브랜드 사업의 입지를 다졌고, 신세계는 조예 깊은 총사의 안목과 추진력 덕분에 오래전부터 브랜드 사업에서는 유통 3사 중 가장 앞서가고 있다. 심지어 이윤을 생각하면 가져오기 어려운 ‘사카이(sacai)’와 ‘엔폴드(enfold)’ 등의 국내 독점권을 따내서 전체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업그레이드한 점 등은 크게 존경할 만하다.
반면 롯데는 훌륭한 바이어가 많고 브랜드 사업을 하려는 의지도 강하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패션 업계를 전망하는 나의 눈에는 포텐셜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지 못하는 롯데가 늘 안타깝다. 나는 유통 3사가 유통뿐 아니라 브랜드 사업도 균형을 맞춰 가며 선의의 경쟁을 하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더 건강한 마켓이 형성되리라고 본다.
신세계는 이미 ‘몽클레르(Moncler)’를 갖고 있으니 롯데가 에르노를 가져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것이 마중물이 돼 롯데가 진취적으로 브랜드 사업을 영위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에르노의 클라우디오 사장과 한 약속이 있었다. 그는 에르노라는 브랜드를 발굴하고 에르노에 보여준 나의 열정을 잘 알았고, 나에게 “한국 시장에 대한 독점을 고려할 때 가장 먼저 나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겠다”라는 약속을 한 바 있다. 보통 이탈리아인들은 약속이나 의리보다는 실리, 즉 돈의 액수에 따라 움직이는데, 이런 면에서 에르노의 클라우디오 사장은 이례적일 만큼 의리와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다. 또 그만큼 고집이 세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나는 브랜드 사업을 담당했던 당시 롯데GFR에 에비뉴엘 명동의 로케이션을 직접 진행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한마디로 나와의 협업을 제안한 것이다. 롯데는 나와의 협업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을 것이고 위험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다음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롯데는 어차피 어카운트 권한이 없으니, 스페이스 눌의 어카운트로 사 온다. 둘째, 에르노는 바잉이 쉽지 않은 브랜드이기 때문에 내가 바잉까지 해주겠다. 이렇게 하면 에르노 바잉 경험이 전무한 바이어가 하는 것보다 소진율이 30% 이상은 높을 것이다. 원한다면 바이어 트레이닝도 시켜 주겠다. 셋째, 모든 오퍼레이션은 롯데가 직접하고, 바잉에 드는 돈도 롯데가 지급한다.
당시 나는 클라우디오 사장에게 특별히 허락받아 작게나마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디스카운트를 받는 어카운트였다. 그래서 나는 롯데에 그 디스카운트 액수만큼만 수수료를 받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면 롯데는 다른 어카운트와 똑같은 가격에 사 오는 것이 된다. 나의 수수료 액수는 출장비조차 댈 수 없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나는 나대로 아픈 손가락인 롯데를 도울 수 있어 좋고, 롯데는 본인들이 할 수 없는 에르노의 마켓 테스트를 해볼 수 있어 좋은 기회였다. 또한 자신이 붙으면 버짓을 제대로 정해서 독점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 나와의 협업은 롯데에 명백하게 좋은 일이었다.
이 협업은 극비리에 진행돼야 했기에, 롯데에 에르노 본사 및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분간은 극비로 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도 “당연하지요, 저도 그 정도는 알지요. 업계 룰인데요”라고 하며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 밀라노의 에르노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롯데 말로는 내가 그에게 이러이러한 제안을 했다던데, 그것이 사실인가를 묻는 전화였다. 나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무엇보다 에르노에 대해 신의를 저버린 것처럼 보인 것이 창피했다. 나는 에르노 본사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던, 갤러리아와의 가격 마찰로 입었던 피해를 설명하며,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고, 결국 에르노 측은 나라는 사람을 잘 알았기에 이해해 줬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난 건지 확인하기 위해 롯데에 전화를 걸었다. 신의와 비밀보호의 의무를 저버린 것에 대해 문자 그대로 노발대발했다. 들어 보니 사정은 이러했다. 당시 롯데GFR 대표는 이탈리아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어서 이탈리아인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한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신의보다는 버짓에 따라 움직이고, ‘스페이스 눌’보다 롯데가 훨씬 크니 직접 해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에르노의 클라우디오 사장은 보통 이탈리아인이 아니다. 롯데GFR 대표는 이탈리아 브랜드와 이탈리아인에 대한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결국 에비뉴엘 명동의 그 자리는 롯데도 선점하지 못했고, ‘스페이스 눌’도 선점하지 못한 채(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신세계로 어카운트 권한이 넘어갔고, 자연스럽게 신세계가 독점권을 가져오는 수순을 밟아 2016년에 에르노에 대한 국내 독점권자가 됐다. 한마디로 신세계가 에르노의 독점권을 가져오는 데 롯데가 큰 도움을 준 셈이다.
신세계가 독점을 제안하며 클라우디오 사장과 미팅한 그날, 클라우디오 사장이 이탈리아에서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해왔다. 그는 ‘독점 테이블에 나를 제일 먼저 앉힐 것’이라던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고, 신세계가 ‘cosmic number(어마어마한 액수)’를 테이블에 올려놓아서, 나에게 그 액수를 제안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여 신세계와 독점을 진행하겠다는 사과의 전화였다. 나는 그에게 신세계는 브랜드 사업에도 정통해 있고, 좋은 고객들도 많이 보유하고 있으니 에르노의 ‘퍼펙트 파트너’가 될 것이라며 축하해 줬다.
그로부터 7~8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에르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독점권자인 신세계에 한마디 충언을 해주고 싶다. 보통은 독점 파트너가 생기면 에이전트의 역할이 크게 줄기 때문에, 브랜드에서 에이전트에 주는 수수료는 현격히 줄어들거나 아예 없어진다. 그만큼 독점 파트너에게 디스카운트로 돌아온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에이전트는 수수료를 그대로 다 받고 있다고 한다. 신세계는 ‘cosmic number'를 바잉하면서도 1%의 디스카운트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되면, 에이전트 수수료가 신세계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에르노는 직구 및 병행수입이 활발해서 신세계는 가격 저항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이는 브랜드의 성장에 있어 큰 난관이다. 이탈리아 브랜드들은 세계 어느 나라 브랜드들보다 버짓에 따른 할인율이 높다. 그러니 재계약을 할 때, 신세계는 에르노에 꼭 할인율을 제대로 요청했으면 한다. 결국 신세계가 받을 할인율은 국내 소비자가에 반영돼 소비자의 이득으로 돌아오고, 이는 국내에서 ‘에르노 마켓의 성장’이라는 선순환을 가져올 것이다.
에르노 여성복을 발굴해서 국내 소비자에게 첫선을 보인 바이어로서, 또 에르노를 사랑하는 고객으로서 에르노가 몽클레르를 능가하는 제1의 패딩브랜드로 자리 잡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스토리(RHK)
- 패션MD :Intro(RHK)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4년 1월호에 게재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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