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⑬ - 이탈리아편 Ⅱ

패션비즈 취재팀 (fashionbiz_report@fashionbiz.co.kr)
23.11.30 ∙ 조회수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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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br>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⑬ - 이탈리아편 Ⅱ 3-Image


여성스럽고 가벼운 패딩이 없던 시절, ‘에르노(Herno)’는 국내에 소개된 지 3~4시즌 만에 모든 편집숍 바이어들이 원하는 인기 브랜드가 됐다. 그 말은 곧 브랜드를 둘러싼 전쟁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브랜드 전쟁은 대개 ‘어카운트의 난립-메이저 어카운트의 경쟁-독점’이라는 3단계로 진행된다.


전쟁의 1단계는 너도나도 바잉하는 다수의 어카운트 오픈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되면, 서로 다른 마크업(markup, 판매 가격 산정)으로 인한 가격경쟁이 문제가 된다. 특히 백화점 숍이 아닌 오프라인의 작은 편집숍에서는 거의 30%에 달하는 백화점 수수료를 낼 필요가 없기에 마크업 자체가 낮아져 소비자가에서 20% 이상 차이가 나게 된다.


다음 시즌 에르노 바잉을 위해 밀라노에 갔을 때 클라우디오 사장에게 진지하게 이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곧장 한국으로 날아와 에르노의 모든 어카운트를 하나하나 다 둘러보고, 숍의 이미지와 가격도 꼼꼼히 비교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3 어카운트 정책이었다. 3개의 어카운트만 에르노의 제품을 한국으로 가져갈 수 있다는 결정이었다. 크고 작은 여러 편집숍의 가격경쟁이 예비 전쟁이었다면, 이제 3명의 주자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셈이다. 2단계는 기간별로, 또 백화점별로 세 번의 스테이지를 거친다.


우선 첫 번째 스테이지의 세 선수는 스페이스눌, 신세계, 후발주자로 들어선 갤러리아백화점이다. 갤러리아백화점 내 스페이스눌에서 에르노 판매가 급상승하고 있는 것을 본 갤러리아백화점은 모노 브랜드를 전개해 달라고 필자에게 제안했다. 그런데 초창기 에르노는 깃털 빠짐과 지퍼 불량 등의 문제도 있고, 모든 패딩 브랜드가 그렇듯이 에르노도 S/S 시즌에 팔 것이 거의 없어 정규 모노 매장으로 가져가기는 힘들다며 고사했다.


필자가 고사한 진짜 이유는 예산을 들여 투자하려면 독점이 전제가 돼야 하는데, 당시 클라우디오 사장은 한국에서는 독점 계약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중간에 있는 한국인 에이전트와 소통하던 다른 곳의 바이어들은 이를 알 턱이 없었다. 최초 매장, 독점 브랜드, 독점 아이템 등을 지향하던 당시 갤러리아백화점은 에르노 본사(라고 쓰고 한국인 에이전트라고 읽는다)에 얘기해서 갤러리아백화점 이스트에 2013년 F/W 시즌을 맞아 국내 최초로 에르노 모노 매장을 론칭했다.


갤러리아백화점은 홍보를 위해 클라우디오 사장을 한국으로 초대했고, 여러 주요 매체를 초청해 갤러리아백화점 에르노 매장 내에서 대대적으로 인터뷰도 진행했다. 하지만 갤러리아백화점은 큰 이익을 내지 못했다. 스페이스눌을 에르노의 가장 큰 경쟁자로 생각하고 백화점 입점 브랜드가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마크업인 2.2배수로 가격 산정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스페이스눌이 전략적으로 물량을 많이 준비한 아이템의 정보를 미리 알았는지 그 아이템을 백화점 쿠폰북에까지 실으며 2.0배수 가격으로 판매했다. 마크업은 숍 전체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신세계에서도 갤러리아백화점의 에르노 덤핑에 대해 에르노 본사에 정식으로 항의했을 정도다. 에이전트가 급히 날아왔으나, ‘이미 나온 가격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잘 조율하겠다’라는 답이 전부였다.


갤러리아백화점은 당시 가장 큰 바잉을 진행했던 스페이스눌의 가격과는 거의 30% 이상 차이 나는 소비자가를 내세워 고객을 흡수하자는 전략을 세웠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그러니 그들도 실제로는 적자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질 것이다.


갤러리아백화점은 독점 브랜드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했을까? 만약 철석같은 독점 약속이 없는데 모노 매장에, 브랜드 대표를 초대해 매체 인터뷰에 2.0배 마크업 등을 했다면 그건 정말로 무모함을 넘어 바보짓이다. 에이전트로부터 받은 구두 약속을 에르노 본사의 의견이라고 철석같이 믿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갤러리아백화점은 레인 크로퍼드(Lane Crawford) 출신인 진 콜린(Jean Colin)의 시대였다. 바이어로부터 에르노의 독점 계약이 확정이라고 보고 받은 진 콜린은 2014년 F/W부터 에르노의 국내 독점계약을 따낸 것을 본인의 성과로 ‘마무리(?)’ 짓기 위해 직접 밀라노로 날아갔다.


2014년 F/W 쇼룸이 열리던 2014년 2월 말이었다. 진 콜린은 에르노 쇼룸에서 클라우디오 사장에게 ‘약속’했던 대로 독점을 달라, 갤러리아백화점이 스페이스눌 예산과 신세계백화점 예산도 다 흡수하겠다고 했다.


클라우디오 사장은 자기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고, 아직 그럴 생각도 없다고 했다. 그러자 진 콜린은 엄청나게 화를 내며 그렇다면 갤러리아백화점에 있는 에르노 매장을 닫겠다고 선언하고, 그 자리에 있던 갤러리아백화점 바이어들을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앞으로 자기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갤러리아백화점에서는 No Herno, No K(한국인 에이전트)라고 선언을 했다고 한다. 시끌벅적하게 오픈했던 갤러리아백화점의 에르노 단독 매장은 실제로 1년도 채 영업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필자에게 3월 초 에르노 에이전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갤러리아백화점과는 직접 일하지 않기로 했고, 필자에게 갤러리아백화점의 어카운트를 줄 테니, 일주일 안에 서둘러 오더를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알아보던 중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 에이전트의 말을 믿고 그대로 오더 진행을 했으면(물론 그렇지는 않았지만!), 그 많은 재고를 어쨌을까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갤러리아백화점이 에르노 전쟁에서 물러남으로써 본선 스테이지 1은 막을 내렸다. 갤러리아백화점은 에르노라는 회사의 기업 문화와 기업 대표의 성향 등에 대한 조사가 부족했고, 에이전트의 말에만 기대다 보니 재정적인 면에서도 이미지에서도 실(失)을 가져왔다. 단순한 바잉이 아닌 브랜드의 파트너가 되려면, 브랜드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그러니 브랜드가 나고 자란 나라의 민족성 및 기업 문화를 아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패션비즈 취재팀   fashionbiz_report@fashion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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