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⑫ - 이태리편 I

패션비즈 취재팀 (fashionbiz_report@fashionbiz.co.kr)|23.10.26 ∙ 조회수 2,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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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노(Herno)와 골드바(gold bar)

[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br>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⑫ - 이태리편 I 70-Image



‘몽클레어(Moncler)’와 함께 럭셔리 패딩 브랜드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에르노(Herno)’는 목덜미 부분에 달린 작은 골드바가 특징이다. 원래 에르노에는 이 골드바가 없었다. 지금부터 이 골드바가 생겨난 작은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겠다.

2008년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에 개점한 ‘스페이스눌(Space Null)’은 고급스럽고, 우아하면서도, 흥미로운 변주가 있는 여성스러운 편집숍이다. 그런데 편집숍의 매니저가 치프 바이어인 나에게 ‘엄명’을 내렸다. 겨울 매출은 패딩과 그 안에 받쳐 입을 얇고 고급스러운 소재의 스웨터가 매출의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하는데, 우리 편집숍은 패딩 종류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치프 바이어인 내가 패딩을 ‘패션 의류’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의 패딩 사랑은 가히 세계 최고다. 북유럽 브랜드인 호프(Hope)의 디자이너는 “한국이 북유럽보다 훨씬 덜 추운데 대체 왜 한국인들은 겨울에 패딩만 찾느냐”라고 의아해했다. 유럽과 미국 브랜드는 패딩 전문 브랜드가 아니면 코트류는 많지만, 패딩류는 거의 없다. 그것도 구스다운이 아닌 폴리에스테르, 즉 솜을 충전재로 사용한 패딩코트가 다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겨울에 지하철을 타면 다른 나라와 달리 거의 모두가 패딩을 입고 있다.

왜일까? 우리나라는 온돌 문화가 발달해서 집 안이 따뜻하고, 건물도 난방이 잘 돼 추운 겨울에도 실내에서는 스웨터 하나면 충분하다. 그러니 바깥에 나갈 때, 겉옷 한 벌만 걸쳐 입게 되는데, 한겨울에는 스웨터 위에 코트 한 벌만으로는 추위를 감당하기 힘들다. 대신 두꺼운 패딩은 한국의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딜 만하다.

사실 겨울에 집 안에서 옷을 얇게 입고 있는 나라는 매우 드물다. 유럽은 건물들이 워낙 오래되다 보니 난방이 잘 안 돼 집에서도 티셔츠, 스웨터, 카디건 등을 껴입는다. 미국은 여름에는 추울 정도로 냉방을 하지만, 겨울에는 우리나라만큼 따듯하게 난방을 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옷 입는 스타일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레이어링, 즉 겹쳐 입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에도 휘뚜루마뚜루 입을 수 있는 원피스 · 티셔츠 · 셔츠 하나면 되고, 겨울에도 얇은 캐시미어 스웨터에 가벼운 패딩 하나면 된다.

2007~2008년쯤 패딩이란, 캐나다구스(Canada Goose)와 무스너클(Moose Knuckles) 등 무겁고 남성스러운 아웃도어패딩이 전부였다. 몽클레어도 당시에는 스키 탈 때나 입는 기능성이 뛰어난 옷이었을 뿐 지금처럼 ‘패션’에 속하는 브랜드가 아니었다. 즉 패딩은 우리 편집숍과는 어울리지도 않고, 나의 관심사 밖의 옷이었다.

매니저의 ‘엄명’이 떨어진 뒤, 우리 편집숍과 어울릴 만한, 그리고 나와 비슷한 스타일과 취향을 공유하는 고객을 위한 ‘패딩 찾아 삼만리’ 여정이 시작됐다. 그러던 중 미국의 D&A(Designers and Agents)라는 트레이드 쇼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패딩을 발견했다. 그때까지 봤던 패딩과는 달리 가볍고 여성스러웠다. 나도 입고 싶은 패딩이었다.

그 패딩을 만든 건 이탈리아 브랜드였다. 나는 우리나라의 다른 회사가 바잉을 했는지 물었다. 아직 아무도 바잉을 하지 않았다기에 나는 곧장 이탈리아 본사에 직접 콘택트를 해서 바잉을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최초로 스페이스 눌에 에르노가 소개됐다.

지금이야 어느 브랜드에서든 여성스럽고, 가볍고, 소재도 부드러운 경량패딩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그런 패딩은 우리나라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들었다. 에르노를 처음 봤을 때 내 눈이 번쩍 뜨였던 것처럼 현대백화점 고객도 에르노 패딩에 뜨거운 사랑을 보내줬다. 첫 시즌 완판, 다음 시즌 재구매율 100%였으니, 이런 패셔너블하고 고급스러운 패딩에 목말랐던 고객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바이어로서 고객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어 뿌듯했다.

이렇게 경량패딩이 패션계에서 이슈가 된 뒤 바로 다음 시즌 유니클로에서 10분의 1 정도 가격에 경량패딩을 출시했다. 그것도 에르노에서 가장 잘나가는, 코트 속에 입을 수 있는 짧은 경량패딩과 거의 같은 디자인이었다. 고객들은 에르노와 유니클로가 거의 구별이 안 된다고 말했다. 나도 비교를 위해 유니클로의 패딩을 하나 사 입었다. 에르노는 안에 있는 구스다운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흩날리는데 유니클로는 그런 현상이 적었다. 디자인도 비슷하고, 가격은 말도 안 되게 차이 나는데, 차별화된 성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럭셔리 패딩 에르노라는 브랜드 이름을 알릴 필요가 있겠다고 판단했다.

클라우디오 에르노 CEO는 내가 바잉을 갈 때마다 항상 오후 시간을 비워 이탈리아식 식사를 대접해 줬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에르노를 내가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했다는 점과 내가 에르노를 내 브랜드처럼 사랑한다는 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는 에르노에 대한 나의 여러 생각을 경청했다. 나는 보통 하나의 브랜드를 바잉하면 그 브랜드를 같이 발전시켜 나가자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시장의 피드백과 나의 의견을 얘기한다. 그러면 시즌이 갈수록 브랜드는 더 좋아지고, 한국 시장에 더 잘 맞는 아이템이 많아져 서로 윈윈이 된다.

클라우디오가 한국에 왔을 때 점심 미팅을 하며 그에게 유니클로와의 유사성과 퀄리티 문제를 얘기했다. 유니클로와 차별성을 위해 몽클레어처럼 잘 보이는 곳에 브랜드 로고를 달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클라우디오는 퀄리티로 승부를 걸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 로고 플레이에 부정적이었다. 옷의 정면에 로고가 보이는 것은 싫다고 했다. 나는 목덜미를 가리키며 “여기는 어떤가요? 작게 달면 귀여울 것 같은데요”라고 했고, 그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 시즌에 내가 가리킨 바로 그 목덜미 자리에 에르노라고 쓰인 작은 골드바가 달려 있었다. 나의 제안에 대한 클라우디오의 대답이었다. 귀엽고 감사했다. 지금은 에르노의 국내 독점권자인 신세계인터내셔날이 내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스토리(RHK)
- 패션MD :Intro(RHK)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3년 10월호에 게재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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