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5)
- 샴페인과 새벽이 있는 삶
살다 보면 삶의 태도나 관점에 큰 영향을 주는 사건 또는 모멘텀을 만나게 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나 강의를 접하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는 니체가 실바플라자 호수를 산책하던 중 피라미드 모양의 바위 앞에서 영원회귀 사상을 생각해 낸 것처럼 뜻하지 않은 조우로 생길 수 있고, 평범한 일상을 와장창 무너트리는 사고로 만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다.
2000년 7월, 스물셋 대학생이었던 이지선씨는 7중 추돌사고를 당한다. 전신 3도의 중화상을 입고 40번이 넘는 수술과 재활치료를 이겨낸 그녀. 어지간한 사람은 삶의 의지조차 잃을 큰 사고였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보스턴대 재활상담학 석사, 컬럼비아대 사회복지학 석사,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현재 한동대학교 상담심리 사회복지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됐다는 이지선 교수는 사고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바꾸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며 삶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사랑을 깨달은 결과다.
모멘텀을 변화와 성장의 힘으로 삼을 것인지, 그저 운명을 탓하며 그 앞에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인지는 오롯이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버텼던 샴페인에서의 4년 6개월의 생활은 몇 번이나 그대로 부서져 내리고 싶었을 정도로 결코 녹록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1997년 일리노이 대학교에는 나 외에 두 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더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석사시험에 실패한 후 박사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한 사람은 ABD(All but dissertation: 박사 논문만 남기고 모든 과정을 끝낸 학생을 의미한다. 논문을 완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단어가 생겨났겠는가)로 결국 박사 논문을 쓰지 못했다. 유학생만 그런 게 아니다. 나와 함께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던 미국인 남학생 세 명 모두 박사학위를 받지 못했다. 미국에서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게 그만큼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나마저 학위를 따지 못하면 그들의 눈에는 또 한 명의 실패한 한국인으로 보일 것이다. 일리노이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한국인 후배들의 입학 허가도 더욱 어려워질 터였다. 외국에서 살다 보면 자의든 타의든 자국을 대표하는 사람이 된다. 실제로 인생을 살면서 내가 대한민국 국민임을 이 시절만큼 의식하고 산 적이 없다.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기에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스러웠고, 공부를 잘하는 것은 물론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내게는 어린 두 딸이 있었다. 베이비 시터도 없이 딸 둘을 데리고 공부를 한다는 건 24시간을 48시간처럼 써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으면 선배 유학생들의 뒤를 이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게 된다. 하루를 쥐어짜듯 생활해야 했다.
당시 하루 일과는 이랬다. 매일 오전 8시 비몽사몽인 아이 둘을 자동차 뒷좌석 카시트에 앉힌다. 옷은 쫄바지에 티셔츠로 전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미리 다 입혀 둔다. 첫째 아이를 킨더가든에 등교시킨 후 곧바로 차를 몰아 둘째 아이를 프리스쿨에 데려다 준다.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보낸 후 일리노이 대학교에 도착하면 오전 9시다. 도서관을 찾아 틈틈이 공부하고, 강의를 듣고, T.A(대학생들에게 강의 · 토론 · 실습 등을 지도하거나 과제물 평가 등의 업무를 하는 대학원생) 오피스에서 학생들 상담하고, 강의 준비를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면 어느덧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할 오후 5시가 된다.
아침에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아이들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끝낸다. 아이들과 함께 수영장이나 모래밭에 가거나 호수 주변을 따라 인라인스케이트를 탄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이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스킨십과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작은 것이라도 폭풍 칭찬을 퍼부었다. 녹초가 된 아이들을 씻긴 후 침대에 눕히고 책을 읽어 주면 어느덧 저녁 8시. 오른팔에는 첫째를, 왼팔에는 둘째를 안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 1, 2시에 일어나 공부를 시작했다. 문자 그대로 촌음을 아껴가며 밀린 공부를 하다 보면 순식간에 아침 8시가 된다. 그렇게 잠든 딸들을 깨워 자동차 뒷좌석에 태우는 것으로 또 다른 하루를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습관도 이때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잠들면 안 된다’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새벽에 대여섯 잔의 커피를 마셨는데 결국 한 달도 안 돼서 위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나는 아프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아니 아플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커피 대신 우유를 마셨는데 신기하게도 커피를 마신 것과 같은 효과를 불러왔다. 단지 체중 증가라는 부작용이 생겼을 뿐이다.
중요한 석사 시험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 시험은 5주 동안 치러지는데 첫 번째 주에는 고대 노문학, 두 번째 주에는 18세기 노문학, 세 번째 주에는 19세기 노문학, 네 번째 주에는 모더니즘, 마지막 주에는 부전공인 폴란드 문학 시험을 보는 것이다. 혼자 감당하기에는 아주 방대한 양이기에 보통은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작가별로 기출문제를 정리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나는 동기보다 두 배가량 학점을 많이 들어, 그들보다 1년 학점을 미리 이수한 관계로 함께 공부할 사람이 없었다. 오롯이 혼자 그 험난한 과정을 헤쳐 나가야 했다.
석사 시험 준비로 도서관에 앉아 공부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머리가 터질 정도로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어김없이 아이들의 하교 시간이 다가왔다. 정신없이 차를 몰아 아이들을 픽업한 후 집으로 돌아와 자동차 뒷문을 열었다. 그런데 카시트에 혼자 앉아 있던 둘째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엄마, 언니는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다. 아뿔싸, 첫째 픽업을 깜빡한 것이다. 6시가 훌쩍 넘은 시간, 눈앞이 캄캄했다.
다시 차를 돌려 첫째가 있는 학교로 갔다. 어둑한 체육관 바닥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던 첫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함, 죄책감, 대견함에 말없이 아이를 꼭 안아 줬다. 이런 엄마 마음을 알았는지 아이 역시 그 작은 팔로 힘 있게 나를 안아줬다. 불안, 걱정, 안도, 사랑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던 일찍 철든 여섯 살배기의 그 눈동자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 한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런 새벽이 있는 삶 덕분에 미국에서 석박사학위를 4년 반 만에 끝내는 것은 물론 All A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사모를 쓸 수 있었다. 일리노이인들의 눈에 훌륭한 대한민국 대표가 된 것이다. 브라이언 트레이시(백만불짜리 습관의 저자)는 ‘사람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사람을 만든다’라고 했다. 나의 경우에는 상황이 습관을 만들게 했고, 그 습관이 일리노이에서의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2002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지금까지 쭉 ‘새벽이 있는 삶’을 지속하고 있다. 새벽이 있는 삶 덕분에 도스토옙스키 문학 작품을 20여 권 번역하고(지금도 번역을 하고 있다) <패션 MD> 시리즈도 출간할 수 있었다. 그 당시 IMF로 인해 경제적 · 육체적 · 정신적으로도 매우 버거운 4년 반이었지만, 샴페인에서의 시간은 차고도 넘치게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또 하나의 모멘텀이 생기지 않는 이상 나의 새벽이 있는 삶은 지속될 것이다.
■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스토리(RHK)
- 패션MD :Intro(RHK)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3년 3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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