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 리브랜딩 기대 만발

이영지 객원기자 (yj270513@gmail.com)|15.08.05 ∙ 조회수 13,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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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콤비 니콜라 제스키에르 · 마리 아멜리 소베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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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4월 LVMH 그룹은 올 1분기 매출 실적을 발표하며 패션 디비전의 매출이 13% 성장한 배경에 「루이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진행한 새로운 컬렉션과 제품들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이 있다고 발표했다. 관계자는 정확한 수치는 밝히지 않았지만 「루이비통」이 “한해를 훌륭하게 시작했다"고 전하며 “그가 강력한 크리에이티브 모멘텀을 이루어 냈다”라며 노고를 치하했다.

「루이비통」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무려 40% 증가(LVMH 패션 디비전 평균 29%를 상회)해 최근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이며 그룹 매출의 50%를 리드하는 맏언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마크 제이콥스가 떠난 이후 2013년 말 새로운 아티스틱 디렉터로 영입된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이러한 활약의 배경에는 「발렌시아가」 때부터 함께해 온 그의 뮤즈이자 절친이며 패션 컨설턴트로 일하는 마리 아멜리 소베를 빼놓을 수 없다.

「발렌시아가」에서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십여년간 함께 일한 마리 아멜리 소베가 오랜 절친이자 파트너를 따라 「루이비통」에 조인한 것은 빅 뉴스였으며 그 결과도 좋은 것으로 평가된다. 때문에 「발렌시아가」 부활의 주역인 두 명의 콤비가 앞으로 이끌어 갈 「루이비통」의 미래는 밝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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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분기 매출 LVMH 13% 성장 뒤에 「루이비통」

2013년 말 「루이비통」 여성복 컬렉션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영입돼 ‘LVMH’ 제국의 왕관을 쓴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과거와 미래의 밸런스를 맞추는 리뉴얼 작업을 하면서 브랜드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의 천재적인 재능은 혁신적인 실루엣과 커팅 에지(cutting-edge) 패브릭 사용으로 다시금 「루이비통」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루이비통」에 지금 필요한 것이 새로운 로고라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세계에서 가장 큰 럭셔리 브랜드를 리뉴얼하는 데 어울리지 않는 발상일 수도 있다. 「루이비통」의 브라운-골드 콤비의 모노그램 로고는 지구상에서 가장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루이비통」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조인하면서 그가 원한 것은 ‘좀 더 쉽고 은근한, 덜 기하학적이고 좀 더 부드러운(둥근) 느낌’으로 이 전설적인 브랜드에 새로운 스타일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니콜라는 영감을 찾기 위해 과거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눈에 띈 것은 수많은 자료 가운데 찾아낸 「루이비통」의 첫 부티크(1800년경 오픈한) 사진 중에서 출입문 위에 붙은 둥근 장식 안에 살짝 비스듬히 누운 LV 로고였다. 이렇게 해서 새롭게 탄생한 로고는 제스키에르의 트렁크 모양 클러치백에도 새겨졌다.

제스키에르, 「발렌시아가」서 「루이비통」까지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전통 있는 패션 하우스에 가면 브랜드의 과거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반면 제스키에르는 미래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1997년부터 15년 동안 「발렌시아가」의 디렉터로 일하면서 그는 커팅 에지 디자인과 러버에서 플라스틱까지 스쿠버 다이빙에 사용되는 소재들을 사용하는 등 미래적이고 건축적인 디자인으로 알려졌다.

「루이비통」에서 새로운 장을 시작한 제스키에르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밸런스를 찾는 작업 중이다. 현재만을 생각하는 것도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의 첫 「루이비통」 패션쇼를 위해 게스트들에게 보내는 초대장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열정’이라는 문구를 넣어 그가 추구하는 크리에이티브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힌트를 줬다.

그는 「루이비통」이 오랜 역사를 통해 쌓은 가죽 제조 전문기술과 새로운 테크놀로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실루엣을 결합해 새로운 룩을 개발한다. “과거 나의 역할은 항상 헤리티지와 히스토리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찾는 것이었고 관련 리서치에 정말 열심이었다. 지금 나는 더 성숙했고, 더욱 혁신할 수 있다. 하지만 혁신의 배경에는 위대한 클래식을 쌓기 위한 진정한 탐구라는 관점이 존재해야 한다.”

새로운 스타일을 상징할 수 있는 로고의 탄생

「루이비통」은 항상 과거와 미래 사이를 넘나든다. 수년 동안 「루이비통」은 그 유명한 모노그램(1896년에 만들어진)을 사용한 캔버스백과 액세서리들을 만들어 왔다(브랜드 자체의 역사만 4세기를 넘는다). 이 제품들은 97억유로(약 12조원)에 이르는 「루이비통」 연간 매출과 그 45%를 차지하는 영업이익의 가장 중요한 매출원이다.

또한 「루이비통」은 설명이 필요없이 「셀린느」 「펜디」 「크리스티앙디오르」 등의 브랜드와 모엣샹동 샴페인, 헤네시 꼬냑 등을 보유한 럭셔리 세계 1위 럭셔리 자이언트 LVMH(Louis Vuitton Moet Hennessy) 그룹의 가장 중요한 브랜드다.

그동안 「루이비통」은 로고로 시장을 장악해 버렸고 어느 순간 매출이 침체하기 시작했다. 애널리스트들은 ‘로고에 지친 현상’이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라벨이 도처에 널려 있다면 어떻게 럭셔리와 명품으로서 차별화된 브랜드의 대표가 될 수 있겠느냐고 의심했다. 결국 「루이비통」의 경영진은 패션(의상)에 좀 더 투자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1990년대 말부터 하이엔드 레디투웨어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디투웨어의 발판을 마련한 마크 제이콥스는 2013년 자신의 브랜드에 집중하기 위해 브랜드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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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 전문기술과 뉴 테크놀로지, 실루엣 결합

올해 44세로 작은 키에 에너지가 넘치는 제스키에르는 아직도 보이시한 룩이지만 짙은 갈색 눈썹에서 그의 진지함이 묻어난다. “히스토리와 헤리티지는 사람들이 럭셔리 브랜드의 비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루이비통」은 브랜드에 걸맞은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독학으로 패션을 배운 제스키에르에게 「루이비통」은 일종의 졸업무대와 다름없다. 루덩(Loudun)이라는 지역에서 자란 그는 청소년 시절 이미 패션에 꿈을 뒀다. 하지만 패션 스쿨에 가라는 부모의 압박을 뿌리치고 파리지앵 메종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에서 큰 스텝은 18세에 「장폴고티에」에서 일한 것이다. 제스키에르는 고티에를 ‘나의 눈과 손’을 뜨이게 해 준 곳이라며 감사를 전한다. “쉽지만은 않았다.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금방 학교를 졸업했거나 18세는 아직 학교에 다닐 때였으니까. 그에 대해 콤플렉스는 없지만 항상 정상적인 사이클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은 있었다. 나는 당시 이미 내 나이에 비해 앞선 포지션에 있었다.”

세계 넘버원 유명 브랜드, 하지만 로고에 지치다

제스키에르는 「발렌시아가」의 라이선스 일을 포함한 몇몇 프리랜스 작업도 했고 그 일들은 좋은 훈련이 됐다. 그는 「발렌시아가」에서의 경험을 오랜 배움의 과정으로 본다. 하지만 패션계는 그의 업적(작품)을 세상을 흔들어 놓은 세기의 컬렉션으로 평가한다.

물론 그의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은 ‘라리아트백(Lariat bag)’이지만 그가 규정한 실루엣(독특한 톱과 매칭시킨 하이웨이스트 스키니팬츠에서 크롭트 재킷과 글래디에이터 샌들까지)이 모든 레벨의 패션 브랜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발렌시아가」에서 창업자의 클래식한 디자인을 재해석한 제스키에르의 아방가르드한 컬렉션은 프레스의 극찬을 받으며 바로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

“나는 「발렌시아가」를 위해 상업적인 컬렉션을 개발했지만 진정한 챌린지는 이 캣워크용 의상이 현실이 되는 것이었다”라고 밝힌 제스키에르는 2012년 말, 15년간의 헌신을 뒤로하고 갑작스럽게 브랜드를 떠났다. (「발렌시아가」와 제스키에르는 최근 법정 밖에서 소송전을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끝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발렌시아가」에서 나는 대단한 경험을 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패션스쿨도 안 다닌 천재 디자이너 제스키에르

「루이비통」은 또 다른 도전이다. 창업자의 죽음 후 갑작스럽게 지도에서 사라져 버린 「발렌시아가」와는 다르게 「루이비통」은 대중의 레이더망에서 빠져 나간 적이 없다. 「루이비통」에 조인하면서 제스키에르는 브랜드의 클래식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가 피치를 올리는 부분 중 하나는 새로운 라인의 백이다.

“나는 현대 여성들이 들 만한 기능적인 클러치백을 만들고 싶었다. 이브닝 백이 될 수도 있고 작은 데이 백이 될 수도 있는 아이템, 그러나 브랜드의 밸류를 보여 줄 수 있는 그런 백을 원했다”라며 그는 “「루이비통」의 아이코닉한 트렁크의 독창적 디자인을 가지고 사이즈만 줄이는 것이 아니다. 가장 심플한 아이디어는 이들을 새롭게 재탄생시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박시하고 메탈 장식으로 헤비한 기존의 트렁크를 가는 스트랩의 미니어처 사이즈로 재탄생시켰다. 매출이 주춤하면서부터 「루이비통」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특히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아이디어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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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에 손과 눈을 뜨이게 해 준 곳 「장폴고티에」

“그는 나에게 ‘대단하다’고 말했고, 그 후 ‘윈도에 디스플레이하면 매우 아름다울 것이다. 잘 어울리는 것 같다’라는 그의 한마디가 나에게 힘이 됐다”라고 제스키에르는 말했다. “아르노 회장은 경영적이고 전략적인 비전뿐만 아니라 우리가 매장에서 어떻게 머천다이징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에스테틱(미적)한 비전까지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런 비전을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는 「루이비통」의 전문성인 가죽제조 기술을 살려 레디투웨어의 개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먼저 자신의 시그니처 소재가 된 가죽을 활용하기 위해 아틀리에 장인의 기술로 핸드백 가죽을 아주 얇게 가공하는 작업을 했고, 다음으로 의상에도 가죽을 적용하는 도전을 했다. 처음으로 가죽 워크숍에서 런웨이를 위한 드레스가 만들어졌고 일부 드레스는 가죽 상체와 패브릭 스커트가 콤비된 스타일도 있었다.

“의상과 마찬가지로 백도 가벼움이 무척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매우 현대적인 의상으로 아름다운 실루엣을 지니고 아름다운 건축적 느낌과 형태, 은 퀄리티의 소재로 작업된 동시에 무게도 10킬로그램을 넘지 않아야 한다.” 그는 서모 셰이핑(thermo-shaping) 가죽이나 울트라 사운드를 이용해 패턴 작업을 하는 등 스스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테크닉으로 컬렉션 작업을 시도했다.

아이코닉 트렁크 재탄생시킨 새로운 라인의 백

최근에는 두 가지 다른 소재를 열로 작업해 완벽한 피니싱(finishing)을 내는 기계를 도입하기도 했다. 실루엣은 그가 선호하는 시대 중 하나인 1970년대풍으로 작업했다. 칼라(collars)는 크고, A-라인 스커트는 허리에 꺾여 늘어진 벨트로 포인트를 주고, 빈티지 루킹의 가죽코트도 있다.

이런 모든 작업을 진행할 때 제스키에르에게 또다른 ‘눈’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마리 아멜리 소베다. 그녀는 ‘비즈니스 오브 패션(Business of Fashion)’과의 과거 인터뷰에서 “나는 디렉터의 오른팔이 되어 디자인 스튜디오에도 가서 일하고, 다음 「루이비통」 컬렉션의 첫 모델이 누가 될지를 선정하는 디테일한 부분 등 패션쇼 진행에도 관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광고, 마케팅까지 그동안 「발렌시아가」에서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일하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브랜드와 관련된 다양한 업무를 진행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베와 제스키에르의 조우는 당시 「장폴고티에」에서 일하던 친구 리오넬 베메이의 소개를 통해서 처음 이루어졌다(당시 제스키에르는 「장폴고티에」에서 인턴십을 하고 있었다). 25세이던 이 디자이너가 1997년 「발렌시아가」의 최고 자리에 올랐을 때 소베는 그와 처음으로 함께 일을 하게 됐다.

스튜디오에만 머물지 않는 스타일리스트 컨설턴트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15년간 아티스틱 디렉터로 일하면서 다 쓰러져 가던 「발렌시아가」를 일으켜 세웠을 때 그의 옆에 항상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뮤즈이자 믿을 만한 대화 상대인 마리 아멜리 소베였다. 「발렌시아가」는 이 환상적인 콤비의 작업으로 브랜드의 품위를 되찾았고 이후 패션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흥미진진(?)한 컬렉션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브랜드 고유의 절제되고 매우 세련되며 추상적인, 어떻게 보면 워리어(전사)를 연상시키는 실루엣을 창조해 내면서 성공시대를 써내려 갔다. 사실 마리 아멜리는 제스키에르의 스튜디오 어드바이저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패션계를 주름 잡는 스타일리스트이자 컨설턴트다.

그는 1980년대에 처음으로 파리 ‘보그’에서 인턴십을 하며 패션계에 데뷔했다. 하지만 소베의 패션에 대한 관심은 그보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프랑스 사람이다. 당연히 패션은 생활의 일부이고, 그 속에서 자라났다. 파리에서 자라면서 패션은 환경의 일부가 됐다. 마치 뮤지엄, 아름다운 건축물이나 좋은 와인이 그렇듯이.”

세계적인 포토그래퍼들과 작업하며 풍부한 경험

인턴이었을 때 이미 그녀는 패션계의 단맛 쓴맛을 다 봤다. 인턴십이 끝나고 마리 아멜리 소베는 ‘보그’에서 어시스턴트로 수년간 일했다. 당시는 특히 ‘보그’가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때로 “개성이 강한 최고의 포토그래퍼들이 포진해 있고 모든 것이 대단했고 나에게 엄청나게 다가왔다”라고 그녀는 회고했다.

전설적인 포토그래퍼 가이 부르딘과 콜래보레이션할 때의 일화다. “‘보그’에서 그와 일을 시작했을 때, 모두 그에게 절대로 ‘No’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촬영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번 작업에는 하늘에 구름이 떠 있어야 한다’라고 했고 나는 ‘당연하죠. 어떻게든지 준비해 보겠습니다. 문제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No’라는 말을 가능하면 하지 않게 됐다.”

그녀가 포토그래피에 대해 배우는 와중에도 패션에 대한 경험은 중요하게 다가왔다. 당시는 패션 잡지들이 토털룩을 진행하던 때로 모델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브랜드의 옷만을 입었다. 마리 아멜리 소베는 당시 머리를 쥐어뜯었다고 회상했다. “충분하지가 않았다. 보그가 나에게 너무 좁게 느껴졌고 모델들에게 너무 유명한 브랜드들만 입히는 것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고 느꼈다.

보그 떠나 프리랜서로, 다시 「발렌시아가」 합류

1996년 그녀는 ‘보그’를 떠나 프리랜서를 선언했다. 「트루사르디」에서 잠시 일한 그녀는 이미 몇 년 전에 만나 알고 지내던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프로포즈로 「발렌시아가」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훨씬 뒤에 그녀는 보그로 돌아가 저명한 편집장 카린 로이펠드와 일했다.)

「발렌시아가」에서 제스키에르는 집요한 실험 정신과 창조적인 실루엣, 패브릭 그리고 테크닉으로 시즌을 거듭하면서 패션계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이나 「발렌시아가」의 과거 자료에 의존하기보다 자신만의 독창적 크리에이티브로 늘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건축적인 디자인과 앞서 가는 마인드, 특히 다리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게 하는 날렵한 실루엣의 팬츠 등은 여성들과 미디어의 총애를 받으며 마치 우상처럼 숭배됐다. 그의 영향력이 여러 방면으로 타 브랜드들의 패션쇼에 영감을 주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하이테크 패브릭에 대한 열정으로 결과적으로 리서치와 개발에 집중했고 결과 하이테크 소재가 일반적으로 쓰일 만큼 대중화시켰다.

“우린 둘 다 열정적이고 겁이 없으며 하드 워커”

마리 아멜리 소베는 ‘여성’으로서 자신이 느끼는 바를 그에게 전달한다. “우리는 특히 직감을 많이 따른다. 우리는 둘 다 열정적이고 겁이 없으며 확고하다. 그리고 늦은 밤까지 일하는 하드 워커다. 그것이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다.” 2012년 11월 제스키에르가 「발렌시아가」에서 나오면서 마리 아멜리 소베도 곧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스타일리스트로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몇 안 되는 초창기 스타일리스트였다.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그동안 「발렌시아가」에서 쌓은 나의 경력과 보는 눈은 다른 디자이너들이나 이후 매거진에서 일할 때 차별화 요소가 됐다.” 「발렌시아가」 이후 현재 그녀는 몇몇 중요한 고객을 대상으로 컨설팅과 스타일링을 한다. “현재 내 역할은 멀티 플레이어다. 하루는 스티븐 마이젤과 스튜디오(사진)에서 작업하고, 다음 날은 니콜라와 스튜디오(디자인)에서 작업한다.”

그녀는 오전에는 익명의 한 고객(회사)을 컨설팅한 후 점심은 「루이비통」의 커뮤니케이션 대표와 함께한다. 오후에는 스티븐 마이젤과 정규 팀으로 일하는 ‘보그 이탈리아’의 촬영을 위해 준비 작업(의상, 로케이션, 기타 소품)을 한다. 물론 니콜라와 함께하는 몇 가지 일을 제외한 일들이다. “우리는 절친이다. 우리만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면 결국 엄청난 시너지를 서로 주고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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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디자인 컨설팅 스타일링… 멀티 플레이어

니콜라 제스키에르와의 작업 말고는 대부분 포토그래퍼와 타이트하게 콜래보래이션을 진행한다. 그녀는 스티븐 마이젤과의 작업이 마치 탁구를 하는 것처럼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다가오는 페이지 작업에 어떤 주제를 쓸지, 어떤 모델이 이슈를 가장 잘 소화해 낼지 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는 어떤 의상의 콘셉트가 어떤 주제에 가장 적합할지에 대해 설명한다.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하다 보면 둘 다 만족시킬 만한 이미지가 완성된다.”

많은 브랜드가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전략을 개발하고 적용하지만 그 미션은 때로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각 브랜드에 맞는 특별한 비전을 어떻게 찾아내느냐는 질문에 크리에이티브 과정은 거의 점괘(?)처럼 나타난다고 그녀는 전했다. “그 과정은 마치 내 머릿속에 컴퓨터가 들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라벨(브랜드)을 말해 주면 그에 걸맞은 비전이 매칭된다. 정확한 비전이 내 머릿속에 따라온다.”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처음 시작부터 같이하면서 모든 것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지금은 「파코라반」과 일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지우고 새롭게 시작했다. 진정으로 브랜드를 완전히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다. 나는 도전하는 일을 좋아한다. 때문에 브랜드가 완전히 사양길을 걷고 있다고 해도 나는 이렇게 말한다. ‘오 마이 갓, 작업(리뉴얼)하는 게 장난이 아니겠군요.’” 그만큼 도전적이라는 의미다.

둘다 자신의 브랜드 론칭 꿈 “좋은 타이밍 있을 것”

그녀에게 5~10년 후 미래의 모습을 물으니 “나는 현재 내가 있는 곳에 만족한다”라며 “언젠가 나의 잡지를 창간하고 싶다. 너무 기쁘고 신날 것이다. 나는 잡지를 사랑한다. 특히 인디펜던트하게 남아 있는 잡지들을”이라고 덧붙였다.

제스키에르 역시 「루이비통」을 위한 새로운 클래식을 창조한다는 것이 그동안의 갈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까. 그는 꽤 오랫동안 자신의 브랜드 론칭을 꿈꿔 왔다. 세계 최고의 럭셔리 그룹에 조인했다고 해서 그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내가 그것을 꿈꾸지 않는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언젠가는 하고 싶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좋은 타이밍이 있다. 현재 나는 내 꿈이나 갈망을 잊고 「루이비통」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했다.

현재 제스키에르는 미래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아제딘 알라이아가 나에게 항상 말했다. ‘어찌 됐건 패션(론칭)은 40세에 시작하면 된다. 그보다 빨리 시작할 필요는 없다’라고. 나는 지금 44세다. 사실 4년 전에 시작해야 했다. 어쨌든 그 아이디어는 나에게 그동안 많은 시간을 줬기에 만족한다.”






**패션비즈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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