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⑩ - 일본편Ⅳ

패션비즈 취재팀 (fashionbiz_report@fashionbiz.co.kr)|23.08.07 ∙ 조회수 4,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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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BR>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⑩ - 일본편Ⅳ 3-Image



협상은 곧 전투! 언어라는 무기 장착하는 법

언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각법, 역사관, 세계관이 켜켜이 녹아 있다. 일본어는 특히 더 그렇다. 일본에는 규모가 큰 회사라 하더라도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스태프가 드물어서 일본 회사와 비즈니스를 할 때 일본어를 할 수 있으면 훨씬 유리하다.

통역을 통해 의사전달을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정’과 ‘관계’를 쌓는 데도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식사 자리에서 유머나 농담 등이 오갈 때, 그것은 맥락과 찰나의 미학이기 때문에 통역을 통하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더 이상 유머도 농담도 아닌 시들한 것이 되고 만다.

물론 일본어를 못 해도 일본 브랜드와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 통역사나 일본 브랜드를 전문적으로 소개해 주는 회사를 이용하면 된다. 하지만 길게 보면 그리 추천할 만한 방법은 아니다. 브랜드 측에서는 이런 중간 업체에 마진을 따로 떼어 줘야 하므로, 바잉 액수가 커진다 하더라도 카게리츠(掛け率), 즉 홀세일 가격의 비율을 낮추기가 힘들다.

나중에 브랜드 회사와 아무리 친해져도, 브랜드 측에서 중간 업체를 빼고 우리와 직접 거래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통역을 끼고 일본 회사와 비즈니스를 하던 사람이, 통역을 담당하던 사람에게 일본인 파트너를 빼앗겼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린다.

말을 통해 ‘정’이 쌓이고, 정을 통해 ‘관계’가 생긴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관계’를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다. 중국인도 ‘꽌시(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중국의 ‘꽌시’와는 조금 다르다. 일본인의 ‘관계’는 좀 더 이성적이고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는 ‘관계’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영어는 미국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어다. 외국과의 비즈니스를 하려면, 비단 패션계뿐만 아니라 어느 영역에서라도 영어는 필수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와 비즈니스를 할 때, 그 나라의 언어에 더해 ‘유창한’ 영어까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저 하나의 의사소통 수단을 더 갖는다는 의미를 넘어 협상할 때 커다란 무기를 손에 넣는 것을 의미한다.

팽팽한 협상은 일종의 전투와도 같은데, 그때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절대 상대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7년 전의 일이다. 로샤스(Rochas), 질 샌더(Jil Sander), 버나드 윌헴(Bernhard Willhelm), 크리스티앙 뵈이넝스(Christian Wijnants) 등의 브랜드를 소유하고 생산 · 판매하며, 일본 내 미쏘니(Missoni) 판권도 가진, 럭셔리 패션으로는 일본에서 가장 큰 기업인 온워드 카시야마(Onward Kashiyama)가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의 전 세계 판권을 갖게 됐다. 패션을 사랑하는, 새로 온 CEO인 오구라 상이 데바스테 디자이너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런데 나와 매우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던 데바스테 디자이너들은 한국 판권만은 나에게 남겨 줘야 하며, 내가 그들의 조건에 협의해야 전 세계 판권 계약서에 서명하겠다고 했다. 일본의 높은 홀세일 가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적잖이 고민이 됐다.

카게리츠뿐만이 아니다. 프랑스에서 선적할 때는 FTA의 적용을 받아 관세를 낼 필요가 없지만, 프랑스 제품이라도 일본에서 선적을 하면 FTA 적용을 받지 못해 그만큼 원가가 높아진다. 그것은 곧 국내 정가에도 반영돼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다.

대기업인 온워드 카시야마의 해외 쪽 CEO인 오구라 상과 그의 두 보좌관이 작은 수입패션 회사 사장인 나를 설득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나는 그들과의 전투를 위해 유명한 한정식 집을 예약했다. 4인실이 아닌 6인실을 잡아서 한쪽에는 나 혼자 앉고, 반대편에는 오구라 상이 가운데에, 그리고 나머지 두 보좌관을 그의 양쪽에 앉게 했다. 식사를 시작할 때는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는지, 일본 날씨는 어떤지, 이 식당의 분위기와 음식은 어떤지 등 가벼운 주제를 일본어로 이야기했더니 대화는 점점 부드럽고 좋은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들도 좋은 음식에 편안한 언어로 소통하니 서서히 긴장의 끈을 내려놓는 것 같았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중요한 비즈니스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됐다. 미니멈과 카케리츠 등 민감한 비즈니스 현안을 처음에는 일본어로 말하다가(이런 어려운 얘기를 하기에는 나의 일본어가 부족한 척을 하며) 빠른 속도의 영어로 내가 원하는 것을 쏟아냈다. 나의 태세 전환에 그들이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나의 요구에 그들도 영어로 반박해야 하는데,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서 심리적으로 위축된 것이다. 협상에서는 쫄면 진다. 식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가자 그들이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속이 탔나 보다. 패잔병 같아 보여 짠했지만 데바스테 ‘찐’ 고객들을 생각하면 쉽게 양보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이 협상 테이블에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었다. 보통은 양사 간의 협력과 조화,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관계의 지속성 등도 중요하다고 여겨 두 개를 얻는 대신 하나 정도는 양보하는 식의 협상 스타일을 좋아하지만 이번만은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었다. 이 좋은 브랜드를 가장 좋은 가격에 고객에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사전에 자세한 계획을 세우고 철저히 준비한다. 이 협상을 위해서도 그들은 플랜B와 플랜C 등 온갖 전략을 짜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계획은 영어 앞에 쪼는 순간 다 무너져 내렸다. 협상 테이블에서 때로 언어는 이렇게 강력한 마키아벨리적인 무기가 된다.

일본인의 소통 스타일은 미국식 스타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곤혹스럽다. 그들은 간접적인 소통을 선호한다. 직접적인 비판이나 갈등을 회피하며, ‘No’의 경우에도 대놓고 ‘No’라고 말하는 것을 꺼린다.

예를 들어, “조금 생각해 보겠다” “それはちょっと(소레와 촛도; 그건 좀)” 식의 표현은 그냥 여지없이 ‘No’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돌려 말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받은 일본식 교육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 아이들이 자랄 때 가장 많이 듣는 두 가지 말이 ‘礼儀正しく(레이기 타다시쿠: 예의 바르게)’와 ‘迷惑をさせないで(메이와쿠오 사세나이데 : 폐를 끼치지 않게)’다.

또한 일본인은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화나 슬픔, 부정과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예의에도 어긋나고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행동이라 여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는 태도를 뼛속 깊이 지니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일본의 문화와 풍습뿐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불의의 대형 사고가 났을 때, TV에 나오는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자식의 죽음 앞에 울고불고 대성통곡을 하지만, 일본 부모들은 눈물을 삼키며 오히려 “폐를 끼쳐 미안하다”라고 한다.

이렇게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훈련이 돼 있는 일본인들의 ‘돌려 말하기’와 ‘간접적으로 말하기’ 특성을 알지 못한다면, 일본과 비즈니스를 할 때 당황스러운 상황이 연출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일본과의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일본어와 더불어 일본 문화에 대해서도 꼭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민족성도 독특하고 비즈니스 문화도 독특하다. 일본인의 비즈니스 스타일은 한마디로 ‘장인정신은 있으나 상인정신은 없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섬나라 사람이다 보니 외부 사람이나 영향에 대해 처음에는 매우 의심스러워하고 마음을 터놓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비즈니스를 통해 인간적인 신뢰를 얻는다면, 그다음부터는 어떤 상황에서도 전혀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성도 높은 최고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개인도 기업도 융통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환율변동에 따른 할인 등에 대해서는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세상 이치가 그렇듯, 완벽한 것은 없다.


■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스토리(RHK)
- 패션MD :Intro(RHK)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3년 8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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