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⑨ - 일본편Ⅲ

패션비즈 취재팀 (fashionbiz_report@fashionbiz.co.kr)|23.07.12 ∙ 조회수 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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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br>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⑨ - 일본편Ⅲ 3-Image



日 비즈니스의 꽃, 진심이 담긴 ‘의리문화’

일본과 맨 처음 비즈니스를 시작했을 때 생각과 달랐던 일본인의 모습에 매우 놀랐던 적이 있었다. 나는 2007년 편집숍 ‘스페이스눌’을 일본 브랜드들로 시작한 이래, 코로나19 전까지만 해도 1년에 서너 차례 이상 일본 출장을 다녔다. 일본 브랜드의 오너나 디자이너, 해외 판매 담당 직원과는 오랫동안 같이 일해 오며 거의 친구가 될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을 알면 알수록 우리와 아주 다른 생각법[(考え方, 캉가에카타)에 놀란 적이 많았다.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우리는 일본에 대해 미묘한 증오 감정이 있다. 요즘은 좀 달라졌지만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일본인은 악의 화신이거나 사기꾼이거나 기회주의자로 그려졌다.

의리와는 거리가 먼 부류의 사람으로 우리, 적어도 나의 뇌리에는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비즈니스를 하며 족히 수백 명의 일본인을 만나면서 나는 엄청난 신뢰를 느꼈다. 전 세계를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비즈니스를 해왔지만, 일본인보다 신뢰와 의리를 더 중히 여기는 국민을 보지 못했다.

간단한 예로, 브랜드를 바잉할 때 바이어는 한국의 다른 어느 회사가 샀는지를 먼저 묻는다. 가깝거나 경쟁 관계에 있는 곳인데 배수를 적게 할 수 있는 곳이 사면 가격을 맞출 수가 없는데, 그런 경우에는 바잉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브랜드는 그런 것을 물어볼 필요가 없다. 구매액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먼저 온 바이어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른 회사가 더 많은 물량을 바잉하겠다고 해도 그들은 나에게 먼저 묻는다. 후에 온 바이어의 숍과 거리가 어떤지, 그들에게 팔아도 되는지 등을.

처음 ‘스페이스눌’ 편집숍이 두 개밖에 없을 때, 바잉 물량이 정말 적었음에도 모든 일본 브랜드가 다 그랬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 브랜드에서는 있기 힘든 일이다. 거래 기간이 길어지면, 일본인은 공식적인 계약서가 없어도 독점 파트너로 대한다. 그래서 일본 브랜드와 거래할 때는 굳이 미니멈이니, 기간이니 하는 것 등을 명시하는 독점 계약서가 필요 없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파데칼라(Pas de Calais)’라는 일본 브랜드는 파리와 뉴욕에도 매장이 있고 파리패션위크 동안 가장 큰 트레이드 쇼인 트라노이(Tranois)에도 참여하며, 마레지구에도 아주 예쁜 플래그십스토어(트레이드 쇼 기간에는 쇼룸으로 변신)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해외 고객이 많이 찾는 인터내셔널 브랜드다.

내가 이 브랜드의 바잉을 한 지 네 시즌가량 됐을 때쯤의 일이다. 파데칼라를 신세계, 롯데, LF 등이 바잉을 하겠다고 찾아왔다고 한다. 예산도 상당히 많다고 했다. 그런데 나와의 비즈니스에 방해가 되거나 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홀세일 권한을 나에게 맡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해외 홀세일을 하는 브랜드이고 인터내셔널 세일즈를 하는 팀들도 다 갖춰져 있기에 자신들이 직접 팔면 이익이 더 클 텐데, 나더러 자기네 대신 판매도 하고 이익도 얻으면서 대기업 클라이언트를 관리해 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100원어치를 사는 나에게, 1000원어치를 사는 다른 고객을 맡기겠다는 뜻이다. 신뢰와 의리를 중요시하는 나로서도 그들의 제안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사고방식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답을 찾고 싶었다. 답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바로 ‘기리’! 기리(義理, 의리)의 전통에 있었다. 기리는 ‘의리’나 ‘은혜’로 흔히 번역되는데 한국어의 ‘의리’와는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기리는 상대방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이자 상대방에게 은혜를 갚으려는 노력이나 의무감을 뜻한다. 일본 비즈니스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자 일상적으로도 흔히 사용한다. 밸런타인 데이가 되면 흔히 ‘기리 초코(義理チョコ)’라는 단어를 볼 수 있는데,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이나 동료에게 사랑이 아니라 의리로 주는 초콜릿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원래 일본 역사에서 기리는 훨씬 심오한 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나라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가족에 대한 책임,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의무보다 우선시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할복(하라키리, 腹切り)의 전통, 즉 나를 모욕한 사람 앞에서 할복함으로써 그 모욕에 대해 복수하는 것 역시 자신의 이름에 대한 기리를 지키는 것이다.

즉 “나는 내 이름에 대한 기리를 하라키리로 지킬 정도로 정의롭고 대단한 사람인데, 그런 나를 모욕한 너야말로 하찮은 인간이다”라는 의미의 복수다. 인간 심리의 대가인 도스토옙스키도 두 번째 장편 『백치』에서 일본인의 할복 문화를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런 유의 일들이 일본인 사이에서는 종종 일어난다고들 합니다. 모욕당한 사람이 모욕한 장본인에게 찾아가서 ‘너는 나를 모욕했다. 그래서 나는 네가 보는 데서 내 배를 가르려고 찾아왔다’라고 말한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모욕을 준 사람의 눈앞에서 정말로 배를 가르고는 마치 자기가 정말로 복수를 한 듯이 굉장한 만족감을 느낀다는 거예요. 세상에는 정말 별 이상한 사람들이 다 있지요.”

내 생각에 일본인의 의식 속에 있는 진정한 기리 전통의 의미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영화는 <47 로닌>인 것 같다. 일본인이 좋아하는 주제라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47 로닌> 보기를 추천한다. 재미로 보기에도 훌륭하고 일본식 기리 전통을 이해하기에도 매우 적합한 영화다. 내가 경험한 그들의 기리는 파데칼라 브랜드와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들의 브랜드를 먼저 알아봐주고 비즈니스를 지속한 나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어카운트를 넘기는 행동 속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계약서 없이도 독점적으로 브랜드를 주는 것은 거의 모든 일본 브랜드에서 보이는 기리 문화다.

또 나에게 선물을 줄 때도(오히려 내가 선물을 줘야 하는 입장임에도!) 그들은 내가 녹차를 좋아하며 피부가 민감하다는 것을 추측하고는(소소하게 나눴던 대화와 천이 거친 옷은 바잉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했나 보다!) 녹차가 유명한 일본 어느 지역의 장인이 만든 녹차보디로션을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나의 기호와 성향을 고려한 선물이라는 것을 받는 즉시 느낄 수 있는 감동의 선물이었다. 이런 배려와 존중도 기리 문화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에게 선물을 해야 한다면 단순히 가격이 비싼 것보다는 진심이 담긴 선물이 오히려 통할 것이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 역시 기리 문화다. 비즈니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일본인들은 쇼룸 약속뿐 아니라 개인적인 점심 약속시간도 칼같이 지키고, 상품의 딜리버리 날짜도 세계 어느 브랜드보다 정확하게 지킨다. 일본인은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상대가 약속시간에 늦는 것도 자신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느낀다. 일본과 비즈니스를 할 때 오더 데드라인과 페이먼트 데드라인 등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이들과의 신뢰를 쌓는데, 즉 기리 관계를 강화하는 데 기본 중의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를 어길 경우 신뢰, 기리, 관계 나아가 비즈니스를 잃을 수 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의외로 일본 패션계도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관계일 정도로 좁다. 한 브랜드와의 관계를 망치는 것이 다른 브랜드 나아가 일본 브랜드 전체와의 관계를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매 순간 매 관계들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일본 브랜드는 절대로 ‘두루뭉술’ 또는 ‘대충대충’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 일본인이나 회사와 문제가 생긴다면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행동하면 절대 안 된다.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일본인의 기리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 일본과 비즈니스를 할 때는 특히 정확하게, 특히 성실하게, 특히 예의를 지켜 상호 기리 관계를 확실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조언한다. *일본어는 규범 표기가 아닌 현지 발음에 가깝게 적었습니다.



■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스토리(RHK)
- 패션MD :Intro(RHK)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3년 7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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