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⑧ - 일본편Ⅱ
‘코다와리’ 정신이 일궈낸 日 패션산업
일본어에는 한국어에 없는 신기한 단어가 있다. 코다와리(こだわり, 주의 : 코다리 아님!)라는 단어다. 번역하자면 ‘고집’ ‘집착’ ‘타협하지 않는 장인정신’, 즉 영어로는 컨트롤 프릭(Control freak)쯤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빵에 대해 매우 까다롭다” “요리사가 스시를 만들 때 자신만의 방법을 고집한다” “디자이너가 옷을 만들 때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 등의 문장에서 ‘까다롭다’ ‘고집한다’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 등의 의미를 일본에서는 ‘코다와리가 있다’라고 표현한다.
일본에는 대를 이어가며 운영하는 회사나 수백 년 된 시니세(しにせ, 老舗, 노포)가 유독 많은 것도 코다와리 정신 때문이다. 코다와리는 이어령 선생이 쓴 『일본문화와 상인정신』에서 말한 ‘노렌정신’과도 비슷하다. 노렌(のれん, 暖簾, 포렴)은 식당이나 상점 입구의 처마 끝에 걸어놓는 상호가 적힌 천을 말한다. ‘노렌을 건다’는 것은 곧 ‘간판을 내건다’는 의미로, 손님에게 최고의 품질과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그 가게의 신념과 신뢰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재미있게도 이 노렌 전통은 일본 패션 브랜드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노렌은 상점의 상징과 같은 것이기에 크기도 소재도 상점마다 다르며, 오늘날까지도 노렌을 거는 상점이 많아서 원단를 찾는 수요도 많다. 이런 전통 때문인지 일본 패션 브랜드들은 오리지널 원단(패브릭)을 개발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매 시즌 자신들의 로고나 시즌 패턴이 들어간 원단을 개발하는데, 나는 이것 역시 일본의 코다와리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 덕에 일본 원단은 이탈리아 원단과 견줄 정도로 세계 패션계에서 인기가 많다. 심지어 우리나라 최고의 내수 브랜드를 가진 한섬에서도 일본 원단 페어에서 독특한 원단을 발견하면, 다른 회사가 살 수 없게끔 미니멈을 불러 독점으로 구매한다고 한다.
외국의 명품 브랜드들도 일본 브랜드의 오리지널 원단을 늘 눈여겨본다. 일례로 수년 전, ‘일리안로브(ILIANN LOEB)’라는 일본 니트 전문 브랜드에서 실크와 니트를 봉제 없이 그러데이션해 하나의 원단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없이 많은 브랜드를 봤어도 그런 기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시즌, ‘샤넬’이 트위드와 가죽에 똑같은 기법을 사용해 만든 원피스를 선보였다. 모두 샤넬의 신기술이라며 떠들었지만 나와 일리안로브 사람들은 안다. 일리안로브가 파리패션위크의 ‘트라노이(Tranoi)’ 부스에서 처음 공개한 기법이라는 것을.
옷을 제조해 본 경험이 있는 디자이너나 회사들은 알 것이다. 무언가를 개발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를. 시행착오 과정에서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고 그만큼 돈도 많이 든다. 숫자만 생각하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독창적인 원단을 만들려는 도전과 그 경험이 쌓인 결과, 일본 브랜드는 대충 봐도 어느 브랜드인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이덴티티가 강한 편이다.
대표적인 브랜드로는 믹스드 패브릭, 해체와 재창조의 아이콘인 ‘사카이(sacai)’ 고유 패턴과 오리지널 패브릭으로 거의 전 콜렉션을 장식하는 ‘민트디자인(Mintdesigns)’ 여성스러운 자수와 비즈 디테일이 돋보이는 ‘뮤베일(Muveil)’ 아방가르드의 극치를 보여주는 ‘토가(Toga)’ 최근 몇 년간 거의 모든 멀티숍의 단골 브랜드가 된 ‘엔폴드(ENFÖLD)’ 미완성인 듯한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이는 ‘요지야마모토’ ‘꼼데가르송’ 등 일본에는 자기 색을 지켜내며 끈기 있게 장인정신을 보여주는 브랜드가 정말 많다.
지금까지 코다와리 정신의 좋은 점만 이야기했지만 당연히 단점도 있다. 한마디로 융통성이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일본과 비즈니스를 하면서 곤란할 때가 많았다. 바잉을 할 때 자국 문화나 특성에 맞게 약간의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데 일본 브랜드는 쉽게 허락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인은 아우터를 고를 때 앞이 트여 있는 것보다는 단추나 지퍼 등 여밈 장치가 있는 옷을 선호하는 편이다. 상황을 설명하고 디자이너에게 작은 똑딱단추라도 하나 달아 달라고 요청하면, 유럽이나 미국 디자이너들은 거의 수용해 주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 작은 단추 하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전체 디자인의 일부라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좋은 사업 기회를 놓치는 것일 수도 있다(대기업이 아닌 일반 디자이너들의 경우 디테일한 수정 요구는 받아들일 때도 있다).
이렇기 때문에 일본 브랜드로부터 라이선스 권한을 가져올 생각은 당연히 꿈도 못 꾼다. 수입 브랜드를 전개하는 회사는 단순히 옷만 수입하기보다는 라이선스를 가져와 생산 · 판매하려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 수입만으로 수익을 낸다는 것은, 특히 백화점에 수수료를 지불하고 입점해서 전개해야 하는 경우에는 수익구조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회사가 일본에 문을 두드렸겠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본 브랜드의 라이선싱 권한을 가져왔다는 회사는 그동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유명 브랜드일수록 코다와리 정신의 고수들이지 않겠는가. 당연히 자신들이 아닌 남이 생산하는 것을 허락할 수도 없고, 자기들만큼 브랜드 이미지나 품질을 관리할 사람은 없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은 매우 많은 해외 브랜드의 라이선싱을 전개한다. 국내 패션기업인 아이디룩이 ‘산드로(SANDRO)’나 ‘마쥬(MAJE)’ 등의 브랜드를 일부 수입하고 일부는 라이선싱하는데, 이런 일이 일본의 거의 모든 컨템 브랜드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한섬에서 전개하는 ‘랑방콜렉션’처럼 브랜드를 통째로 라이선싱하는, 완벽하게 ‘일본화된 랑방’이나 ‘일본화된 버버리’도 있다. 가격도 수입 ‘랑방’이나 수입 ‘버버리’보다 훨씬 저렴하고 심지어 일본 버버리는 수입 버버리보다 귀엽다. 이렇게 아주 오래전부터 일본에서는 해외의 라이선싱 제품을 기획 및 생산, 제조함으로써 세계적인 브랜드들의 제품을 경험하고 학습했다.
일본 패션산업을 보며 신기하게 여겼던 점은 또 있다. 일례로 작년 11월 신세계 백화점에 갔다가 어느 고객이 입은 ‘플리츠플리즈(PLEATS PLEASE)’ 바지가 정말 예뻐서 곧장 매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매장 옷걸이가 다 비어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마네킹도 하나만 있었는데 마네킹에 입힐 옷이 없어서 한 개만 겨우 세워 놓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원하는 그 바지는 올 3월이나 돼야 한정 수량만 입고되기 때문에 대기 예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한 박스만 들어와도 오픈런으로 즉시 동이 난단다. 일본 현지 사정도 마찬가지다. 수년 전 도쿄에 출장 갔을 때, ‘바오바오(BAO BAO)’ 백을 사다 달라는 지인의 부탁을 받고 두세 군데 매장에 들렀으나 마치 공사 중인 것처럼 매장이 텅 비어 있었다. 일본의 플리츠플리즈 매장도 휑했고, 꼼데가르송의 포켓 티셔츠 역시 여권 소지 고객 한 사람당 두 장까지만 살 수 있었다.
브랜드의 인기라는 것이 언제 사그라질지 알 수 없으니, 기업의 이윤을 생각한다면 인기가 있을 때 생산을 늘려 판매를 극대화하는 게 답이다. 그러나 일본 브랜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한정판 아이템을 특히 좋아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코다와리 전통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도 웬만하면 자신들과 수십 년간 거래한 생산 공장 이외의 다른 공장을 개발하지 않는다. 다른 공장에 자신들의 디자인과 제조법을 제공하는 ‘모험’을 감행하고 싶지도 않고 쉽게 신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어령 선생이 ‘일본문화와 상인정신’이라고 칭한 것을 ‘일본문화와 장인정신’으로 부르고 싶다. 일본인은 ‘이윤을 단순히 추구하는 상인’이라기보다는 손해를 보더라도 본인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코다와리를 지키는 장인’에 가깝다고 말이다. 이것이 오늘날 다양하면서도 창의적인 일본 패션산업을 만든 단단한 기반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어는 규범 표기가 아닌 현지 발음에 가깝게 적었습니다.
■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스토리(RHK)
- 패션MD :Intro(RHK)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3년 6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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