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br>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3) - 시카고와 편집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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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3) - 시카고와 편집숍

Saturday, Jan. 7, 2023 | 외고, mizkim@fashion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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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학원에서 인문학으로 석 ·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서는 상당한 영어 실력이 요구된다. 이공계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기 1년 전, 토플과 GRE(Graduate Record Examination)를 준비했다. 잘 알 듯이 토플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에 유학하려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영어 시험이고, GRE는 미국 대학원 입학 자격 시험이다.

영어+수학+논리를 테스트하는데, 그중 영어는 수준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어지간히 공부했다는 필자도 ‘이 단어에 이런 뜻이 있었어?’라고 생각되는, 당황해서 사전을 찾아보면 한 10번째쯤에야 그 뜻이 나오는 단어를 묻는 시험이기 때문에 매일 사전을 끌어안고 머리에 쥐가 날 때까지 외우고 또 외워야 했다.  

대학원 진학을 앞둔 당시, 현지에 있는 지인의 도움으로 노스웨스턴 로스쿨(North western Law school)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게 됐다. 그곳에서 GRE를 준비하며 낯선 단어와 씨름하길 몇 시간, 문득 고개를 들면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파란 미시간 호수가 보였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호수 위에는 하얀 돛을 단 작은 요트가 예쁜 장난감처럼 떠다녔고, 모래밭 위에는 파란 호수보다 푸르고 싱그러운 젊은 남녀가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파란 바다, 하얀 요트, 알록달록한 수영복을 입고 금발, 은발, 흑발, 갈색 머리카락을 날리며 비치발리볼을 하던 수많은 청춘….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그렇게 미시간 호수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필자에게 큰 힘을 줬고, 그 덕분에 1년이라는 시간을 무사히 버틸 수 있었다.

힘든 시험 준비를 버티게 해준 고마운 존재가 또 하나 있다. 바로 매그니피션트 마일(Magnificent Mile)이다. 매일 오후 4시, 도서관에서 공부를 끝낸 필자는 사우스미시간애비뉴에 있는 집까지 걸어서 돌아갔다. 그 구간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숍을 비롯해 고급 호텔이나 백화점과 쇼핑몰이 즐비한 ‘매혹의 1마일’, 즉 매그니피션트 마일이다.

그곳은 마치 내게 해리포터가 마법 학교 호그와트행 급행 열차를 타기 위한 통로로 사용하는 ‘9와 4분의 3 승강장’ 같았다. 마법 같은 패션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마샬 필드(Marshall field), 니만 마커스(Neiman Marcus), 삭스 피프스 애비뉴(Saks fifth Avenue), 노드스트롬에 들르고 오늘은 블루밍데일스(Bloomingdales)와 헨리 벤델(Henri Bendel)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식으로 메그니피션트 마일을 헤집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콘셉트와 바잉이 가장 좋았던 곳을 꼽으라면, ‘28 shop’이라는 간판을 단 편집숍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 편집숍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때라(1996년!) 28개 브랜드를 한 장소에 모아 놓은 게 참으로 신기했다. 당시 ‘28 shop’에는 미소니(Missoni), 아르마니(GIORGIO ARMANI), 소냐 리키엘(Sonia Rykiel) 등 누구나 다 아는 해외 유명 브랜드부터 욜리 탱(Yeohle)과 엠 캉 등 미국 하이엔드 디자이너의 제품까지 함께 진열돼 있었다.  


"웬만한 미국 백화점은 전체가 하나의 편집숍이라고 보면 된다. 단순히 백화점이라고만 알았던 블루밍데일스도, 이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바잉이 톡톡 튀었던 헨리 벤델도 하나의 편집숍인 셈이다. 그렇기에 모든 백화점이 모두 다른 색깔, 다른 고객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미국 백화점 바이어는 실제로 바잉을 한다. 그래서 명칭이 사는 사람, 즉 ‘바이어’였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몇몇 직바잉 바이어를 제외하고는 진짜 바이어를 찾아볼 수 없다. 미국 백화점의 형식만 빌려온 결과 명칭과 실제 업무가 맞지 않게 된 경우다."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미소니, 발렌티노, 아르마니 등이 진열된 모양새가 남달랐다. 그 유명한 브랜드의 옷이 달랑 두 랙에 걸려 있었고 브랜드명은 랙 위에 꽂혀 있는 작은 팻말에 적힌 게 전부였다. 우리나라 백화점에서 매번 위압감을 가질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한 매장 간판만 보다가 손바닥보다 작은 팻말 로고를 봤을 때의 충격이라니.  

마샬 필드 2층에 자리했던 ‘28 shop’은 한 층 전체를 사용했는데, 이런 형태가 가능했던 이유는 백화점 직영이기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백화점은 어디를 가나 같은 브랜드가 입점돼 있고 동일한 아이템이 진열돼 있다. 한 회사가 수수료를 주고 입점하는 형식이니 당연한 결과다. 미국 백화점은 같은 브랜드라도 바잉이 모두 제각각이다. 의류뿐 아니라 가구와 액세서리 등도 마찬가지다.

웬만한 미국 백화점은 전체가 하나의 편집숍이라고 보면 된다. 단순히 백화점이라고만 알았던 블루밍데일스도, 이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바잉이 톡톡 튀었던 헨리벤델도 하나의 편집숍인 셈이다. 그렇기에 모든 백화점이 모두 다른 색깔, 다른 고객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이 ‘28 shop’을 드나든 결과, 어느덧 매장 매니저들과 점심을 함께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됐다. 개인적 친분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는데 세일, 즉 마크다운(mark down) 시즌이다. 그들은 내가 눈여겨봐 둔 아이템의 마크다운이 시작되면 전화로 먼저 알려줬다.

마크다운 기간은 나에게는 축제와 같았다. 미국인에 비해 체형이 작은 이점을 한껏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옷은 P(petite) 사이즈(필자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신발은 유럽 사이즈 35(215~220㎜)였기에 옷과 구두를 거의 헐값에 사다시피 했다. 당시 그곳에 있는 모든 브랜드의 의류와 구두를 착용했다. 그 덕분에 패션, 특히 하이엔드 패션과 하이엔드 컨템퍼러리를 보는 안목이 현저히 높아졌다.

참고로 우리나라 백화점 세일은 보통 30~50% 내외이지만 미국은 등급이 있다. ‘1st mark down’은 30% 내외, ‘2nd mark down’은 50% 내외, ‘final sale’은 70~80% 정도 가격이 다운된다. 직바잉이기에 가능한 정책이다.  

매니저들에게서 받은 도움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들에게서 미국과 한국 백화점의 차이와 미국 바이어(buyer : 사는 사람)와 한국 바이어의 차이도 알게 됐다. 미국 백화점의 바이어는 대부분 판매직 출신이다. 미국 백화점 바이어는 실제로 바잉을 한다. 그래서 명칭이 사는 사람, 즉 ‘바이어’였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몇몇 직바잉 바이어를 제외하고는 진짜 바이어를 찾아볼 수 없다. 미국 백화점의 형식만 빌려온 결과 명칭과 실제 업무가 맞지 않게 된 경우다.  

다양함과 변화무쌍함, 남이 갖지 않은 독특함을 사랑하는 나에게 매그니피션트 마일은 커다란 놀이터였다. 그 덕분에 힘든 GRE 준비를 잘 버텨내고 1년 뒤 일리노이 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원에 입학한 후에도 매그니피션트 마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다.

서울에서 학기가 끝나면 이대 골목을 찾았던 것처럼, 어바나-샴페인에 있는 일리노이 대학교에서도 엄청난 강도의 한 학기가 끝나면 매번 매그니피션트 마일을 찾았다. 자동차 뒷좌석에 두 살과 네 살배기 아이 둘을 카시트에 앉힌 후 시카고를 향해 두 시간을 달렸다. 삶은 그렇게 필자를 편집숍 전문가로 준비시키고 있었다.



■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 스토리
- 패션MD 시리즈

경력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3년 1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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