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SPA가 남긴 교훈은?
「유니클로」 1조원, 「자라」 2500억원, 「H&M」 1500억원. 소위 글로벌 SPA를 대표하는 빅3가 올해 한국 패션시장에서 올릴 것으로 예상되는 매출이다. 이 빅3의 추정 매출 규모만 합해도 1조4000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COS」를 비롯 「GAP」 「포에버21」 「망고」 「조프레시」 등 국내에 들어와 있는 또 다른 글로벌 SPA 매출을 더하면 족히 2조원 규모까지 바라볼 수 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글로벌 SPA가 한국 패션시장에 상륙한 지 10년이 경과했다. 이들은 연간 40조~50조원 규모로 추정되는 한국 패션시장의 마켓 셰어를 단기간 내 4~5% 이상 장악한 것에 이어 가공할 만한 파괴력으로 한국 패션시장을 쥐락펴락하는 현실이다. 과연 이들은 한국 패션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일본의 패스트리테일링(대표 야나이 다다시)과 한국의 롯데쇼핑(대표 신동빈)이 지분 구조 51:49로 설립한 에프알엘코리아(공동대표 홍성호 와카바야시 다카히로)의 경우 지난 2004년 12월16일 설립 후 만 10년 만에 8954억원(2014년 8월31일 결산 기준)을 신고했다.
글로벌 SPA 10년, 올해 2조원 규모로 급속 팽창
올해 8월 말 결산 자료가 발표되기 전이지만 150개 매장서 족히 1조원은 달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05년 9월 한국에 첫 「유니클로」 매장을 오픈해서 만 10년이 경과한 올해 단일 브랜드로 1조원 돌파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한국 패션시장에 남긴 셈이다.
「유니클로」의 속도감에는 못 미치지만 「자라」와 「H&M」 역시 한국 패션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들어가고 있다. 「자라」를 전개하는 자라리테일코리아(대표 이봉진)는 올해 2500억원 매출이 예상된다. 「유니클로」보다 3년 늦게 국내에 진출한 이 회사는 2007년 10월29일 스페인 인디텍스와 롯데쇼핑 간 80:20의 지분 구조로 설립됐다. 결산 기준일이 1월 말인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로 2379억원을 신고했다.
글로벌 SPA 빅3 중 가장 뒤늦게 한국 시장에 직진출한 에이치앤엠헤네스앤모리츠(대표 필립 에크발)는 결산일인 11월 말 기준 지난해 1383억원을 신고했다. 지난 2009년 9월4일 직진출로 들어와 6년이 경과했으며 올해 예상되는 매출액은 1500억원이다.
여성복 캐주얼 속옷 등 패션 전 영역에 직격탄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위력이다. 내셔널 브랜드들이 십수년간 노력해도 이루지 못할 결과물을 불과 10년 만에 뚝딱 해치웠다. 글로벌 SPA가 한국 상륙 10년 만에 2조원 규모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이들의 어떤 가치가 장기 불황 여파로 ‘소비 바닥’을 보이고 있는 국내 소비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게 했을까?
여성복 캐주얼 이너웨어 등 패션 주요 조닝에 있는 연매출 100억원 규모의 200개 로컬 브랜드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동안 이들은 고도성장을 일궈 낸 셈이다. 블랙홀처럼 한국 패션시장의 주요 영역을 쏙쏙 빨아들인 이들의 면면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패션에 관한 소비자들의 가치 기준을 ‘가성비’ 최우선으로 확 바꿔 놓은 것은 글로벌 SPA가 미친 가장 큰 영향력이다. 실제 대다수 글로벌 SPA는 아이템별 가격대를 쇼윈도나 광고 캠페인에 적나라하게 표기해 놓아서 국내 소비자들에게 아이템별 가격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갖게 했다.
연매출 200억 규모, 100개 로컬 브랜드 도산
「유니클로」는 이번 F/W시즌 카탈로그에서 울 블렌드 컴포트 재킷 12만9000원, 캐시미어 스웨터 7만9900원, 울트라 스트레이트 진 5만9000원, 초경량 다운 베스트 5만9900원, V넥 스웨터 4만4900원, 히트텍 니트 스카프 1만9900원 등 모델 착장 컷에 따른 아이템별 가격대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디자인은 심플하고 베이직하지만 이곳에서 내놓은 퀄리티와 가격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다.
서울 중구 명동 스트리트에 위치한 「H&M」 쇼윈도에는 롱 재킷 9만9000원, 울 터틀넥 8만9000원, 드레스 4만9000원, 아동 데님 팬츠 3만5000원 등을 소개하는 POP가 눈에 띈다. 매장 한 코너에서는 이월 재고 물량을 그야말로 파격적인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
「H&M」의 상품 퀄리티에 이의를 제기하는 관계자도 많지만 소비자의 눈높이로 볼 때 이곳에서 내놓는 가격대는 충분한 경쟁력을 갖췄다. 동일 소재를 사용한 로컬 브랜드 대비 50~60%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들이 내세운 아이템별 가격대는 이유를 막론하고 세계에서 가장 비싼 옷값을 지불하던 국내 소비자들의 눈을 확 뜨게 했다.
‘싸고 좋다’는 옷값의 새로운 기준 형성
특히 「유니클로」가 내놓은 F/W시즌 필수 아이템인 스웨터의 경우 최고급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캐시미어 7만~10만원대 초반, 램스울 3만4900원 등 그야말로 합리적인 가격대로 내놓아 화제가 됐다. 스웨터는 기계보다 수작업이 더 많이 필요한 아이템인 만큼 글로벌 소싱력을 겸비한 「유니클로」에 대항하기에는 국내 토종 브랜드들이 아직 역부족으로 보인다.
디자인이 강조된 여성복에 강점이 있는 「자라」는 글로벌한 감성의 블라우스 원피스 재킷 등 우븐 아이템으로 여성 고객들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이들이 선보인 아이템은 글로벌 감성에 가격대도 합리적이고, 유행을 선도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심리까지 꿰뚫어 ‘패스트패션’을 시스템상 완벽하게 구현하며 고속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처럼 국내 소비자들이 패션에 대한 새로운 기준, 즉 ‘가성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게 한 것은 글로벌 SPA들이 한국 패션시장에 미친 가장 큰 영향력이다. 지속적인 혁신과 진화를 통해 ‘가성비’가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소비자들의 니즈를 충족시켜 준 것이다. 넓고 쾌적한 쇼핑 환경과 친절한 고객 응대 서비스는 덤이다.
‘가성비’ 통해 좀 더 나은 삶의 욕구 충족을
둘째, 글로벌 SPA들은 한국 패션시장에 난무하던 옷값에 대한 불신의 벽을 깨고 ‘신뢰’라는 가치도 만들어 냈다. 단적으로 세일 정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각각의 프로모션 정책에 할인 정책을 구사하지만 고객들과의 약속을 정확하게 지켜 나간다. 기준과 원칙 없이 세일을 내거는 국내 로컬 브랜드들과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라이프웨어를 지향하는 「유니클로」는 아이템별 판매 동향을 보고 수시로 할인 정책을 구사하지만 설정된 할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정상가로 환원시켜 할인 기간 내에 사야만 싸게 살 수 있다는 소비자의 신뢰를 만들어 냈다. 다만 다품종 소량생산의 유럽형 SPA와 달리 소품종 대량생산 방식이다 보니 정상 판매보다는 할인 판매 비중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풀어야 할 숙제다.
패스트패션을 지향하는 「자라」는 시즌 중에는 정상 판매를 고수하고, 연 2회 시즌오프만 진행하면서 한 단계 높은 브랜드 가치와 가격에 대한 소비자 신뢰를 확보했다. 6월 말과 12월 말 각각 시행되는 시즌오프 기간에는 40% 오프부터 시작해 최종 70% 오프까지 진행하면서 재고 물량 소진에 총력을 기울인다.
믿고 살 수 있는 브랜드라는 ‘신뢰’도 확보
시즌오프가 끝나면 판매율은 90%에 육박한다. 유럽권의 평균 판매율 95% 대비 5%포인트 정도 낮지만 백화점에 입점된 로컬 여성복 브랜드들의 판매율 55~60% 수준과 비교하면 너무나 훌륭한 성적표다. 설상가상으로 글로벌 SPA의 할인율이 10% 전후인 데 반해 로컬 여성복들은 38~40% 비중에 달해 정상 판매보다는 할인 판매 위주라서 수익 구조는 더욱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
‘뛰어난 가성비’와 ‘신뢰’라는 가치를 만들어 낸 글로벌 SPA들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 패션기업들은 이들 글로벌 SPA와의 한판 승부에서 어떻게 경쟁력을 갖춰 나가야 할까? 전 세계를 상대로 수천개 매장을 운영하는 글로벌 SPA가 뿜어 내는 물동량에 정면 대응하는 것은 곧잘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비유된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국내 최대 패션기업으로 성장한 이랜드그룹(대표 박성수)이 전략적으로 힘을 싣고 있는 카테고리 킬러형의 10여개 SPA와 신성통상(대표 염태순)의 「탑텐」이 ‘글로벌 SPA의 대항마’로 거론되고 있다. 기대를 모은 삼성물산(패션부문 대표 윤주화)의 「에잇세컨즈」는 차별화된 비즈니스 전략을 내세우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양상이다.
판매율 90%, 할인율 10% A급 수준, 우리는?
무엇보다 이랜드그룹은 캐주얼 「스파오」, 여성복 「미쏘」, 이너웨어 「미쏘시크릿」, 아웃도어 「루켄」, 슈즈 「슈펜」, 주얼리 「라템」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글로벌 SPA 역공에 나섰다. 40~50년 내공의 글로벌 SPA에 맞대응하기 위해 단일 브랜드가 아닌 아이템별 카테고리 킬러 전략을 구사한 것.
10여개에 달하는 이들 SPA를 갖고 이랜드그룹은 국내에 이어 중화권 공략에 힘을 싣고 있다. 이랜드그룹이 중국에서 이룩한 브랜드 사업의 성공 모델을 SPA로 확장해 글로벌 SPA와의 한판 승부에 나선 것이다.
신성통상은 40년 이상 니트 의류 중심 수출기업으로서 직접 생산공장을 운영해 온 경험을 토대로 글로벌 SPA 가운데 특히 「유니클로」의 맞수를 자처했다. 대규모 자가 생산시설을 미얀마 인도네시아에 갖춰 놓고 원가율을 확 낮춰 더 뛰어난 가성비로 국내 패션시장을 수성하겠다는 「탑텐」의 각오가 남다르다.
「유니클로」 맞대응? “계란으로 바위 치기”
자금력과 실력, 여기에 박성수 이랜드그룹 회장과 염태순 신성통상 회장이 사활을 걸고 있기에 그나마 글로벌 SPA와의 맞불 작전이 가능한지도 모른다. 다른 패션기업들은 이를 따라 할 수 있는 기초 체력부터 취약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 이미 200억원 규모의 100개 브랜드가 무대 위에서 퇴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글로벌 SPA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국내 패션시장을 초토화할 기세다. 상륙 초기만 하더라도 기초 디자인과 기본 소재 중심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압도적인 가격경쟁력으로 여성복과 캐주얼의 중저가 패션시장을 강타했다. 상륙 10년이 지난 지금은 진화된 디자인과 업그레이드된 소재 사용으로 베터 프라이스 존도 글로벌 SPA의 공략 가시권에 들어갔다.
「라코스테」 「빈폴」 「헤지스」 등 트래디셔널캐주얼은 캐시카우 아이템인 피케셔츠를 「유니클로」에 빼앗겼다. 소비자들은 10만원대의 브랜드 피케셔츠 대신 로고만 없을 뿐 제품력이 비슷한 2만~3만원대의 「유니클로」의 손을 들었다.
중저가 시장 이어 베터 프라이스 존까지 파괴력 확산
20만~30만원대의 프리미엄 진은 「유니클로」가 내놓은 4만~5만원대 가격의 데님에 백기를 들었다. 고공행진을 거듭하던 아웃도어 역시 「유니클로」에서 내놓은 10만원대 경량 패딩이 본격적으로 팔려 나가기 시작한 2~3년 전부터 하향세로 돌아섰다. 우연의 일치일까?
결과적으로 글로벌 SPA가 담아내지 못하는 차별화된 감성과 상품 구성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 요즘 잘나가는 여성복 브랜드 「톰보이」 「럭키슈에뜨」 「SJYP」 등은 디렉터의 디자인 감성이 뛰어난 브랜드로 평가되고 있다. 남성복 「솔리드옴므」와 「시리즈」 역시 뛰어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며 가치를 올리고 있다.
「MLB」 「지프스피리트」 「NBA」는 가격 싸움이 아닌 스포츠 감성을 토대로 한 스트리트캐주얼로서의 차별화를 꾀하면서 경쟁력을 확보했다. 「루이까스텔」 「JDX」 등은 기능성과 패션성을 겸비한 골프웨어라는 특화된 조닝을 집중 공략함에 따라 쓰나미처럼 몰아닥친 글로벌 SPA의 파고를 피해 갈 수 있었다.
글로벌 SPA 장단점 해부 ‘우리도 할 수 있다’
이제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뒤돌아볼 시점이다. ‘가성비 구현’과 ‘소비자 신뢰’라는 소중한 가치를 확보한 글로벌 SPA에 속절 없이 쓸려 가지 않으려면 뭔가 마니아적인 브랜드가 되는 수밖에 없다. 디자인력으로? 퀄리티로? 마케팅력으로? 그 무엇이든 확실한 경쟁력을 확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아픈 현실일 수 있지만 단순 물량 개념으로는 하루 속히 패션시장에서 퇴장하는 것이 현명한 답이다. 지속성장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숙제를 우리에게 안겨 준 것도 글로벌 SPA가 남긴 교훈이다.
글로벌 SPA의 파워풀한 성공은 토종 브랜드들에 국내 마켓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패션시장으로 뻗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 자극제도 됐다. 회사 설립 40년 만에 연매출 20조원을 넘는 규모로 성장한 「자라」와 「H&M」의 눈부신 성장을 가까이서 확인하면서 그들의 프로세스를 익히고 공부하는 계기가 됐다.
회사 설립 30년 만에 연매출 13조원 규모로 성장한 「유니클로」의 성장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그들의 장단점도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갖게 됐다. 이미 한국 패션시장은 글로벌 브랜드들의 각축장이 됐고 그런 만큼 학습의 기회도 있었다는 의미다.
차별화된 아이덴티티 필수, 글로벌 향해 Go~
그들과의 한판 경쟁에서 살아남은 토종 브랜드들은 내수 마켓을 뛰어넘어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지역 진출에 힘을 싣고 있다. 이랜드그룹이 선봉에 나선 가운데 베이직하우스 성주D&D 신성통상 세정 신원 브이엘엔코 위비스 브랜드인덱스 등 패션전문기업들이 속속 가세하고 있다.
삼성물산, LF, 코오롱FnC 등 패션 대기업도 자금력만으로는 글로벌 진출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패션사업의 가장 기본인 브랜딩 강화 작업부터 시작해 파트너를 통한 진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문호를 활짝 열어 놓고 새로운 접근을 하고 있다.
선진국에 비해 패션의 역사는 짧지만 우리는 창의력과 손재주가 뛰어난 많은 디자이너가 최고의 경쟁력이다. 이들의 감성과 감각이 패션기업들의 조직력 자금력과 절묘하게 맞물려 운영될 수 있다면 한국 패션만의 독특한 컬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K팝과 K뷰티의 눈부신 성공에 이어 K패션에서도 글로벌 공략의 멋진 성공 스토리가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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