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관 시몬느 회장
시몬느는 가치생산의 전진 기지

-|05.12.18 ∙ 조회수 6,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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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관 시몬느 회장<br>시몬느는 가치생산의 전진 기지 3-Image



“지난 5년간 전세계 핸드백 시장의 변화는 그 전 15년간의 변화보다 더 크다. 소재 디테일 디자인 등 프로덕트는 놀라울 만큼 향상됐고 시장은 엄청나게 커졌다. 특히 브릿지와 럭셔리 마켓,그리고 마더레이트와 디자이너브랜드의 중간에 위치한 ‘어포더블 럭셔리& 액세서블 럭셔리’ 조닝의 파이가 2배반 만큼 커졌다. 5년 혹은 10년전에 비해 미국 여성들은 연평균 2.4개의 핸드백에서 지금은 3.7개로 늘어났다. 기성복 시장이나 다른 상품에 비해 핸드백 시장은 가히 폭발적이라 할만큼 커지면서 드라마틱한 성장을 이뤘다.”

열정적인 모습의 박은관 시몬느 회장은 전세계 핸드백 시장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기업을 재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최근 몇 년간 어느 회사나 LVMH, 구치 등 액세서리 시장의 성장과 함께 의류 전문회사들은 예외없이 레더굿 디비전을 강화했으며 투자와 사람과 디자이너 등이 이 부문으로 몰리고 있다. 미국의 파슨스와 FIT 등 패션학교의 졸업생들은 5년전부터 핸드백 액세서리 분야 희망이 넘버원이다.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이너들의 핸드백 부문 유입도 훨씬 늘어났다. 광고면에서도 신발과 핸드백 등을 멀티로한 광고가 늘어나는 등 이 부문의 성장과 발전은 눈부신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단연 돋보이는 회사, 경기도 의왕시, 인덕원 4거리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만날수있는 시몬느 본사에 들어가면 세번 놀라게 된다. ‘공장’인줄 알았던 이 회사가 청담동의 갤러리 보다도 더 멋진 건물이라는 사실. 건물의 구석구석에 앉혀진 각종 소품들은 이 회사 박은관 회장이 10년 넘게 직접 컬렉팅한 물건들이다.

청담동 갤러리 보다 더 멋진 사옥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터키 이집트 등 전세계 고가구와 앤틱소품, 한국의 민화 등 4백점의 소품을 업무 공간 설계와 인테리어에 활용했다. 모두가 개인이 수집해 소장했던 물건들. 전 세계를 안방처럼 돌아다닌 그의 궤적과 함께 그 지구 반대쪽에서 건너온 물건들이 모두 제자리인 듯 아름다운 모습을 뽐낸다. 누군가의 말을 빌자면 ‘박 회장이 언젠가 세워질 아름다운 사옥을 위해 하나하나 직접 컬렉트했으며 그 물건들은 모두 몇 년에 걸쳐 건물 한켠에 보관돼왔다’는 것.

2003년 대한민국건축대상을 수상했을 만큼 공들여 지은 사옥, 회사 곳곳에 위치한 엔틱 가구와 친환경적으로 설계된 사무 공간, 퍼스트 클래스 뮤지션을 초대해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시몬느 음악회 등에서도 시몬느의 ‘특별함’을 엿볼 수 있다.

“지난 87년 15명의 직원이 마음을 합쳐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을 때 삼겹살에 소주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우리가 성공하면 멋진 업무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약속했다.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회사가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부터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12시간 이상이니까요. 즐겁게 일하면서 리프레시 할 수 있는 휴게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각층의 화장실도 컨셉을 갖고 꾸몄다. 전체적인 컨셉은 오피스 캠퍼스로 체육관, 산책로, 퍼팅연습장, 연주회가 가능한 대강당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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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종횡무진하는 ‘케니박’

또 지난해부터 시몬느만의 음악회를 시작해 여름에는 재즈를, 겨울에는 클래식 공연을 개최해 다양한 문화활동을 직원들과 공유하고 있다. 매년 개최하는 체육대회 역시 자유롭고 절제된 기업문화를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을 하면서도 쉴 수 있는 다양한 컨셉의 공간들이 연출되어져 있는 시몬느 본사, 그리고 중국 및 인도네시아 공장의 모든 직원이 시몬느 속에서 같이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공유된 믿음과 문화를 업무 속에서 즐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케니박’으로 더 유명한 박은관 시몬느 회장. 10년전 그를 만날 때 그는 4천만달러 규모의 핸드백 수출회사의 사장이었다. 핸드백 수출업체들 사이에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던 시몬느는 당시 40대 초반의 열정적인 수출맨으로서 세계를 종횡무진 달리고 있었다. 당시 시몬느의 주력 바이어는 「DKNY」 「앤클라인II」 「에스쁘리」 「페리엘리스」…지금 그는 2억달러 규모의 글로벌 패션컴퍼니 회장이다. 현재 주 바이어는 「코치」 「케이트스페이드」 「마이클코스」 「셀린」 「로에베」 「지방시」등… 언뜻 보아도 잘 나가는 브랜드들이다.

그의 이름은 한국에서 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하다. 그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 동안에도 시몬느에는 세계적인 패션회사들의 관계자들이 상담을 하기위해 회의실에 모여있다. 모든 바이어들이 떠나버린 한국에 이 회사들은 오로지 시몬느와의 상담을 위해 들어온다.

‘시몬느’ 때문에 한국 못 떠난다?

전세계 럭셔리 시장이 급속한 속도로 커질 때 그 바람을 타고 시몬느도 급성장했다. “LVMH와의 만남도 4년전이다. 유럽의 핸드백 생산기지가 와해되고 붕괴될 무렵 유럽의 럭셔리 브랜드 50개중 10개를 제외하고는 모든 브랜드들이 유럽생산 캐파가 부족하고 숙련공 부족과 함께 가격경쟁력이 약화되자 그때부터 ‘China Rush’가 시작됐다. 이미 중국에 탄탄한 공장을 셋팅해놓았던 시몬느로 몰려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코치」도 7년전부터 거래하기 시작했다. 작년 올해 갑자기 늘어난 전세계 브랜드들의 중국공장 러시 결과 우리와 독점계약을 맺으려고 난리다. 중국에서 럭셔리 브랜드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은 몇 개 안되기 때문.”

현재 LVMH사의 브랜드는 6개 거래하고 있다. 「셀린느」 「로에베」 「겐조」 「지방시」 「크리스찬라크루아」와 함께 미국 브랜드지만 LVMH가 소유한 「DKNY」, 그외 「마크제이콥스」, 「버버리」도 올해 거래를 시작했다. 모두가 차이나 러시 탓이다. 또한 중국에서 럭셔리 브랜드를 생산할수 있는 공장, 계속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잠재력있는 공장이 몇 안되기 때문.

LVMH 소속 5개 브랜드와 거래를

이 같은 배경은 미국 시장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백화점내에서 메이시 백화점 이상은 싸구려 브랜드들을 다 걷어내고 대신 브릿지 브랜드, 럭셔리 브랜드로 모두 교체됐다. 노드스트롬, 블루밍데일즈, 니만마커스, 삭스피프스애비뉴, 로렌테일러, 버그돌프굿맨 등이 그것. 핸드백 매장 공간이 매년 매시즌 계속 확장됐고 「발렌시아가」 「멀버리」 「끌로에」 등 유러피안 새로운 브랜드들이 계속 도입됐다. 3개월만 한눈팔면 트렌드에서 멀어질 정도로 핸드백 시장의 액티비티는 가속화됐다. 어포더블 럭셔리 시장이 2배 이상 커진 것이다. 이러한 세계 시장의 흐름을 예민하게 파악하고 그 흐름을 타는 시몬느는 미래에 대해 매우 낙관적 전망을 점친다.

박 회장이 걸어온 길은 사실 패션과는 무관하다. 큰 원양어선 12척을 운영하던 부친 밑에서 4조선소와 어망 공장 등 자연스럽게 가업을 잇는 4형제 사이에서 그는 자신의 길을 걷고싶다는 생각을 키워갔다. 제물포고와 연세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그는 청산이라는 핸드백 수출업체에 대졸 공채 1기로 입사했다. 당시 이 회사는 3백만달러를 수출하던 중소기업.

청산에서의 그의 족적은 가히 기록적이다. 첫해 그는 30만달러의 AMC로부터 받았다. 이후 청산은 8백만달러 1800만달러 3천6백만달러 5천만달러로 급성장하던 시기. 그는 청산에서 과거의 모든 승진기록을 깼다. 입사 1년 6개월만에 대리 이후 6개월만에 과장 이후 1년만에 차장 이후 1년만에 부장, 이렇게 그는 입사 4년만에 부장을 달았다. 그때 29살.

‘인터내셔널 패션컴퍼니’ 향해 진군

8년간 직장생활을 한뒤 그는 사업을 결심한다. 시몬느 설립과 함께 그가 세운 철칙은 모회사의 바이어는 단 하나도 갖고오지 않는다는 것. 중저가 브랜드에 OEM수출하던 청산과 달리 시몬느는 고급 바이어를 겨냥한 전략으로 집중했다. 이후 박 회장은 중저가 브랜드로부터 상담이 들어오면 청산으로 바톤을 넘겨주었다. 96년을 기점으로 청산 보다 시몬느의 규모가 커졌다. 지금은 사라진 회사 청산을 구하려 한때 시몬느가 대주주가 되기도.

“무슨 일이든 내일처럼 애착을 가져야하며 멈추지말고 일에 부딪쳐야 한다. 또한 언제나 도전을 즐겨야 새로운 세계와 만날수 있다”며 그는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자세를 강조한다. 이제 그는 시몬느에 만족하지않고 수입비즈니스를 통해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하고있다. ‘돈’보다는 언젠가 이루어질 ‘인터내셔널 패션컴퍼니’의 비전을 위해 제조업에서 브랜드 비즈니스로 영역을 확대한 것.

이어서 그가 다시 앞으로 도전하게될 것은 이러한 모든 그의 경험치를 녹여내 만들어낼 인터내셔날패션 브랜드. 젊은 인재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매뉴팩처링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판단으로 수입 비즈니스를 전개하고있으며 이제 「마이클코스」를 통해 이 꿈이 좀더 구체화될 계획. 새로운 꿈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그의 새로운 도전이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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