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럭셔리 지존 「루이뷔통」
「루이뷔통」은 지난 1854년 이후 무려 1백50년간 명품중의 명품으로 군림하며 소비자들이 가장 열망하는 브랜드로 꼽혀왔다. 아이러니하게도 포장용 상자와 여행용 트렁크라는 가장 실용적인 아이템에서 출발한 이 브랜드는 3대에 걸쳐 완벽에 가까운 장인정신이 실현되는 동안 이제는 부와 성공을 나타내는 시대의 아이콘 그 자체가 돼버렸다.
유럽의 상류층과 중동의 석유재벌 그리고 전세계의 이름난 갑부와 귀족은 물론 심지어는 도덕적으로 청렴할 것을 강요(?) 받고 있는 관료와 그의 직계 가족들…그리고 이 시대의 새로운 귀족으로 칭송받는 엔터테이너들에 이르기까지 LV로고는 지속적인 사랑을 받아왔으며 그 인기는 현재로써는 종착점을 가늠하기 힘들다. 알다시피 LV로고가 박힌 가방 하나를 사기 위해 오늘도 파리 샹제리제 거리나 셍제르만데프레 거리에는 마니아들이 넘쳐난다. 현금구매를 사절하고 상품 구입시 개수를 철저히 제한하는 이 브랜드의 ‘자기과시’는 오늘도 수많은 마니아들을 매장 앞으로 이끈다.
최대 시장 일본서 패권, 그리고…
단일 국가로는 이 브랜드에 대한 구매력이 가장 클 것이라는 일본(전세계 시장의 36% 점유, 2001년 기준)을 비롯해 아시아권에서 특히 열망한다는 이 브랜드가 주변 국가들에서 맞는 상황들은 또 어떠한가? 공전의 히트작인 럭셔리 세단 ‘렉서스’를 탄생시키기까지 어느 메이커보다 대중적이고 실용적인 것으로 이름을 날리던 도요타가 일본에서 보급한 자동차대수는 대략 2천만대. 비슷한 수치로 일본 내 「루이뷔통」의 모노그램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약 2천만 명을 넘어선다는 통계수치가 있다. 주변의 알만한 사람은 누구나 한 개 이상은 갖고 있다는 설명. 특히 10대들에 대한 이 브랜드의 보급률은 전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이에 착안한 「루이뷔통」의 일본 시장 접근 방식은 명품이라기 보다 대중브랜드의 그것과 다름 없다.
최근 세계 패션 하우스들 사이에 유독 그 가치를 재평가 받는 국내 시장 역시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다. 비공식적인 통계자료에 따르면 청담동에 자리잡고 있는 플래그십과 역시 강남상권에 위치한 갤러리아 명품관 현대 본점 신세계 강남점 등 규모에 있어서 「루이뷔통」의 국내 최상위 매장을 찾는 소비자는 절반 이상이 20~30대.
때문에 유난히 유행을 쫓는 성향이 강한 국내 소비자들의 이탈로 경기가 악화된 지난해 콧대 높은 잡화 브랜드들이 줄줄이 두 자리수 역신장이라는 된서리를 맞는 동안에도 「루이뷔통」의 경우 이렇다 할 매출감소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해보다 경기가 좋지 않다는 올해 들어서도 점포별 월평균 8억~9억원(갤러리아, 현대 본점)에서 7억원(신세계 강남점)대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며 저마다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임을 자부하는 명품관 사이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영원한 마력(魔力) ‘모노그램’
결국 글로벌 브랜드로 본국에서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그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루이뷔통」이 갖고 있는 최대의 마력(魔力)은 역사와 장인정신 그리고 고유의 마케팅이라는 재료를 절묘하게 배합했다는 것. 오리지널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아래 모든 것을 표현해내고 지켜왔기에 구미를 비롯한 특정 지역기반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마켓을 지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파격적일 정도로 새로운 디자인이 제안되고 성공한 브랜드들이 대게 그렇듯 「루이뷔통」 또한 끊임없이 리노베이션 과정을 거쳐왔으면서도 여전히 초기의 디자인과 새로운 창작 속에 숨어있는 원형이 존재감을 잃지 않고 있는 브랜드는 LV가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1837년 「루이뷔통」의 창시자인 루이뷔통은 자신이 태어난 주라(Jura) 지역을 떠나 파리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포장용 나무상자를 만드는 아틀리에에서 견습생으로 출발한 그는 남달리 정성을 다하고 뛰어난 개성을 담아냈던 트렁크가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으며 1854년에는 드디어 뤼 눼브데카푸친 거리에 자신의 작품을 판매할 첫 매장을 열게 됐다.
젊은 루이뷔통 부부가 플라스 벤돔(Place Vendome)에서 멀지 않은 루 노브 데 카푸친느(Rue-Neuve-des-Capucines)에 차린 첫 매장은 일류 호텔과 오트 쿠튀르 상점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현재는 오페라하우스가 된 장소로부터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매장의 위치 선정보다 더욱 중요했던 결정은 그의 아이템 중 하나를 가죽이 아닌 튼튼하면서도 완벽한 방수성을 자랑하는 가공 캔버스로 겉감을 댄 것이었다. 새로운 디자인을 적용한 「루이뷔통」의 트렁크는 그 즉시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리지널리티에 숨은 창조가 파워
이어 루이뷔통의 아들인 조르주비통(George Vuitton)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1885년에는 외국에선 처음으로 런던에 스토어를 오픈하게 됐다. 섬세한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진 가치 위에 편리함과 안정성이 보장된 브랜드의 가치는 더욱 높아져 특별주문이 끝없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1896년에는 카피 상품으로부터 자사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 또한 아버지 루이뷔통 행적을 기리는 뜻에서 그는 LV로고체와 별모양 꽃모양 섞은 고유의 패턴을 만들었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모노그램의 시작이 됐다.
그 당시부터 이미 「루이뷔통」은 모조품 제조자들을 상대로 한 단호한 투쟁을 시작했는데 이때 가장 큰 무기는 바로 끊임없는 혁신이었다. 이것이 바로 「루이뷔통」의 철학이며 동시에 「루이뷔통」을 최고 품질의 트렁크 제조사로 존속하게 한 정신이었다. 일례로 이들 부자에 의해 시초가 된 모노그램은 그 천재적 솜씨가 인정 받고 성공한 이래로 그 외 다른 주요 브랜드들에 퍼져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로고를 제품의 장식 기조로 만듦으로써 정체성을 보존시키게 했다.
한편 손으로 직접 겉 천을 간 포플러 나무 테두리의 「루이뷔통」 전통 여행 가방과 함께 본사는 확실히 다루기 쉽고 소프트 백(부드러운 소재의 가방)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제작 판매되고 있는 1901 스티머 백(Steamer Bag)이 좋은 예. 또 홀드올(holdall:잡낭)의 개념을 개척한 장본인 역할을 한 것은 1924년에 출품된 킵올(keepall)이었으며 킵올의 제작은 항시 가까이에 소지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써 더 이상 여행 가방 제작소에 전용 제품을 위탁하지 않아도 됨을 의미하게 되었다. 대단한 성공을 거둔 이 아이템은 <스티머(Steamer)>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무늬가 없는 캔버스로 제작되었는데, 그것은 그 당시 방수 처리되고 퍼가모이드(발명가의 이름을 딴)로 강화 코팅 처리 된 모노그램 캔버스는 소프트 백(부드러운 가방)에는 너무 단단해 적용하기 어렵고 또한 깨지기 쉬웠기 때문이다.
패션으로 진출…제2 전기를…
이러한 전통은 그대로 이어졌으며 뷔통家의 3세인 갸스통 루이(1883-1970)는 특히 신기술에 매료되었다. 그는 현대 사회의 삶에 적합할 것이라 믿었던 소프트 백에 자신의 가족 로고를 세길 방법을 연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1959년에 이르러서야 화학 진보의 힘으로 그의 후손인 끌로드 루이 비통이 비로소 린넨과 면을 부들부들한 소재로 코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다양한 형태와 사이즈, 기능을 가지고 있는 부드럽고 다루기 쉬운 소프트 백의 새로운 라인들은 레저 문명 세계 속에서 베이비붐 세대들을 매혹시키기 시작했다. 모노그램 캔버스는 변화무쌍하고 이국적이면서도 우아함을 동시에 갖고 있어 언제나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에 스포츠에서부터 야외 활동과 주말 여행을 위한 장거리 비행시까지 그 용도는 점차 광범위해졌다.
전통에 실용성이 더해져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고 있던 「루이뷔통」은 1998년 비로소 새로운 ‘영광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활동 범위를 넓혀 패션으로 진출하게 된 것. 「루이뷔통」은 이 새로운 영역을 위하여 뉴욕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아티스틱 디렉터로 영입하였다. 이제 마크 제이콥스는 파리에 거주하며 루이 비통의 다른 부서들과 긴밀하게 일하고 있다. 그의 디자인은 「루이뷔통」이 1854년 이후로 지켜온 독창성, 장인 정신, 고품질, 그리고 오랜 전통에 섹시하고 다이나믹한 터치를 가미했다.
그러나 지금은 성공적인 앙상블로 평가 받고 있는 이러한 조합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모험이었다. 고가의 럭셔리 제품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해야 하며, 변덕스러운 취향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명품은 곱게 세월을 먹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해야 한다는 통념 속에서 어떻게 매 시즌 새로운 여성의 매력을 선언하는 패션의 특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가? 그러나 마크 제이콥스의 합류로 「루이뷔통」은 150년 역사의 전통과 새로움, 경쾌함,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사이의 미묘한 발란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즉 마크 제이콥스가 합류한 이래 여전히 모노그램과 다미에 컬렉션은 변치 않는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가 손길이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프레타포르테는 새로운 생명력을 이 브랜드에 불어넣은 것이다.
마크제이콥스, 새로운 생명 창조
패션 세계가 마크 제이콥스가 이끄는 새로운 룩에 도취되어 있는 동안 「루이뷔통」은 새로운 이미지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마크 제이콥스는 아방가르드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노그램 캔버스라는 고정된 주제를 놓고 스티븐 스프라우스 (Stephen Sprouse) 쥴리 버호벤 (Julie Verhoben) 그리고 다카시 무라카미 (Takashi Murakami) 같은 도발적인 예술가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성공을 거둔 이 프로젝트의 기저에 흐른 것은 낭만적 사고방식 팀워크 그리고 글로벌 비전을 가진 깊은 유럽적 감수성의 결합이었다.
이리하여 새로운 명품이 탄생하게 되었다. 2년 후인 2003년 일본 화가 다카시 무라카미는 모노그램 캔버스를 자유롭게 전용하여 ‘아이 러브 모노그램(Eye Love Monogram)’으로 프린트 된 거대한 풍선들로 바꾸어 놓았으며, 이는 전통적으로 「루이뷔통」의 기성복 쇼가 열리는 파리 앙드레 시트로엥 공원 (Parc Andre-Citroen)의 글라스하우스에서 출시되었다.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 행사 후에 무라카미는 「루이뷔통」을 세계 최고의 럭셔리 기업으로 만든 3백 여 개 매장의 윈도우 디스플레이 작업을 도왔다. 무라카미의 첫번째 오디오비쥬얼 작품인 슈퍼플랫 모노그램 (Superflat Monogram) 역시 동일한 주제 하에 잉태된 것이다.
남성들 역시 이 위대하고 유쾌하며 대담한 모험의 수혜자가 되었다. 2000년 1월 마크 제이콥스는 새 천년을 최초의 남성복 컬렉션으로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루이 비통과 마크 제이콥스의 연합은 브랜드의 전통과 가장 현대적인 트렌드를 결합하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해내고야 말았다.
한편 이러한 「루이뷔통」의 패션 진출은 단순한 이미지 변화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우선 매장들이 크게 변하였다. 여행 물품들과 가죽 제품에 더하여 이제 새로운 옷들 구두 액세서리 그리고 보석들이 추가되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패션의 세계는 「루이뷔통」에 확실한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고 새로운 고객 층을 끌어들임으로써 패션은 「루이뷔통」에 새 시대를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우리가 항상 듣는 이야기의 아주 명확한 실례가 될 것이다. “언제나 똑같이 머물기 위하여 모든 것이 변하여야 한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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