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기획] 잘나가는 K-패션 뒤 침몰하는 ‘메이드 인 코리아’ 해법은?
K-패션이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사이 국내 봉제 산업은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본지 <패션비즈>가 찾은 봉제 현장에서는 “지금이 가장 심각하다”라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과거 수출 역군이던 제조 기반이 빠르게 무너지는 현주소를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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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는 K-패션과 대조적으로 K-봉제산업은 침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내 봉제 산업이 길어야 10년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라는 위기감까지 드러낸다. 대표적인 K-패션의 허브인 동대문 상가도 절반 가까이 비어 있고, 오더를 책임졌던 중견 · 대기업들조차 주문량 감소를 이유로 국내 생산 물량을 크게 줄였다는 것이 현장의 설명이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영세 봉제 기업들에 쏠리고 있다. 생산량이 줄고 국내 제조 경쟁력이 전반적으로 약화되면서 봉제 공장들의 연쇄 폐업도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안진석 서울패션봉제산업협회 회장은 “현재 전체 생산량이 체감상 70~80% 정도 줄었다고 본다. 인근 봉제 업체들 사정을 들여다보면 정말 곡소리가 난다”라며 “15~20년 전만 해도 수출이 그나마 꽤 잘돼 공장들이 유지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소량 생산 활로였던 일본 보따리상 물량마저 거의 사라진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꺼져 가는 생산 현장, 오더 감소에 폐업 이어져
봉제 공장을 20년 넘게 운영해 온 한 업체 대표는 “그나마 한국 봉제 퀄리티를 믿고 일본에서 꾸준히 일감을 의뢰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마저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라며 “지금은 국내 주거래 업체 1~2곳에 의존해 가까스로 연명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봉제 업체 대표는 “그나마 잘나가던 옆집 봉제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사용하지 않은 대량의 다이마루 원단을 우리 공장에 무상으로 넘겼다”라며 “일감이 끊이지 않던 공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폐업해 매우 놀랐다”라고 전했다. 현장에서는 이런 식의 폐업 사례가 잇따르며 위기감이 번지고 있다.
최근 발표된 ‘2025 의류제조업 실태조사’는 이 같은 현장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의류제조업체는 전국 2만3507개사로 집계됐으며, 이 가운데 5인 미만 사업장이 81.3%를 차지해 소규모 사업체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거래 구조도 취약했다. 내수 거래처 비중은 97.9%, 수출 거래처는 2.1%에 불과했고 평균 거래처 수는 4.8개였다. 특히 1대 거래처 비중이 71.1%에 달해 주 거래처가 끊기는 순간 공장 운영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매출 감소 폭도 심각했다. 2023년 대비 2024년 매출 감소 비율은 62.9%로 조사됐고 평균 감소액은 7560만원에 달했다. 2024년 매출액을 구간별로 보면 3억원 미만이 82.1%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또 향후 2년간 사업장 운영 계획에 대한 조사에서는 규모 축소 16.4%, 사업 철수 6.1%, 사업 전환 0.5%로 집계돼 23% 이상이 경영난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수치만 봐도 국내 봉제 산업의 체력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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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심각, 봉제 인력 ‘마지막 세대’ 우려
경기 불황 등 복합적인 요인에 따른 오더 감소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돼 왔다. 여기에 소량 생산조차 중국 등 해외에서 가능해졌고, 훨씬 낮은 단가로 제작할 수 있다는 점이 국내 제조 경쟁력을 약화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과거 국내 봉제는 소량 대응과 빠른 생산으로 경쟁력을 유지해 왔지만, 이마저도 예전만큼의 우위를 확보하기 어려워진 셈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봉제 인력 구조와 처우다. 업계 관계자들은 현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봉제 인력이 사실상 마지막 세대일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미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10년 뒤면 봉제 인력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단순히 일할 사람이 모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숙련 기술이 통째로 끊길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 조사에서도 봉제 종사자 가운데 60대 이상이 46.6%를 차지해 고령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숙련도에 비해 낮은 임금과 처우 역시 문제다. 20년 차 베테랑 봉제 인력이라도 월급은 300만원 초반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처우를 개선하려면 봉제 단가가 올라가야 하지만, 단가를 올리면 주문이 줄어드는 구조 탓에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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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젊은 인력 유입 시급, 정부 지원 어떻게?
현장에서는 낮아지는 실수령액을 우려해 4대 보험 가입을 꺼리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처럼 열악한 구조 속에서 2030세대 젊은 인력 유입이 시급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낮은 연봉과 열악한 근무 환경 탓에 진입 장벽은 여전히 높다. 기술을 배우고 오래 일할 유인책이 부족한 만큼 세대교체는 더디고, 산업의 미래 역시 불투명해지고 있다.
봉제 산업 붕괴를 막기 위한 정부 지원책도 마련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이를 두고 ‘희망 고문’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정부는 소상공인을 위한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고 있으나, 정작 폐업 직전이거나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한 영세 업체들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가장 큰 장벽은 ‘신용도’와 ‘세금’이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세금 체납이 없어야 하지만, 영세 업체 10곳 중 7곳은 당장 운영비가 부족해 부가세가 밀린 상태라는 설명이다.
봉제 업체 대표 A씨는 “구청에서 예산이 나와도 막상 은행에 가면 신용도 때문에 잘린다”라며 “당장 5000만원 정도의 자금이 필요한데 결국 그 돈이 다시 빚이 되는 악순환만 반복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결국 신용도가 높은 일부 업체만 저금리 혜택을 받고, 정작 수혈이 필요한 곳은 사채나 추가 부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다. 이처럼 정책과 현장 사이의 간극이 크다는 불만도 적지 않다.
라벨 갈이 · 단가 후려치기, 시장 질서 ‘흔들’
여기에 ‘라벨 갈이’ 문제도 국내 제조업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라벨 갈이는 해외 생산 제품을 한국산으로 둔갑시키는 행위로, 전반적인 제조 신뢰도를 훼손하고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는 대표적 사례다. 관세청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약 2000억원 규모의 상품이 적발됐으며, 이 가운데 95%가 중국산으로 확인됐다. 이런 고질적인 문제가 지금까지 이어지며 산업 기반 자체를 흔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단가 후려치기와 브로커 문제도 수면 위로 올라와 있다. 일감이 들어오더라도 해외 생산 단가를 들이밀며 국내 공장을 압박하는 브랜드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공장 입장에서는 일감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를 거절하기 어려워 낮은 단가에도 일을 맡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결과 공장 전반의 봉제 단가는 한없이 낮아지고 있고, 제조 현장은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
또 실질적으로 중간에서 이익을 취하는 브로커들도 문제로 지목된다. 구청 단체복이나 지역 축제 물량 등 공공 발주 의류는 인맥과 지연을 가진 브로커들이 수주한 뒤 정작 해당 지역과 무관한 경기도 외곽이나 지방 공장에 하청을 주는 구조가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우선권이 있어야 할 지역 공장들은 일감에서 배제되고, 연결된 물량조차 중간 수수료로 인해 공임이 깎이면서 실제 수입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월요기획] 잘나가는 K-패션 뒤 침몰하는 ‘메이드 인 코리아’ 해법은? 4374-Image](https://www.fashionbiz.co.kr/images/etcImg/1775730112837-봉제 산업 붕괴_5.jpg)
‘메이드 인 코리아’ 부활? 실질적 상생 모델 요구
이런 상황 속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부활은 과연 가능할까. 업계 관계자들은 실질적인 상생 모델로의 전환과 인력 육성을 위한 파격적인 투자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주요 온라인 플랫폼에서 성장한 브랜드들이 일정 비율 이상 국내 생산을 유지하도록 유도하고, 이에 따른 세제 혜택을 주는 방안도 거론된다. 또 해외에서 생산하면 일정 금액의 기금을 조성해 국내 생산 기업에 환급하거나 지원하는 방식도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가업 승계 활성화도 중요한 해법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실제로 봉제 공장 2세들이 가업을 이어받아 젊은 인력으로 현장 활성화에 힘을 보태고, 나아가 봉제 공장의 강점을 살린 브랜드를 직접 론칭해 운영하는 방식도 제조와 K-패션 브랜드를 함께 살릴 수 있는 길로 거론된다.
이를 위해서는 증여세 감면과 창업 지원을 연계한 실질적 가업 승계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2세 경영인이 자신의 브랜드를 내걸고 도전할 수 있도록 정책 자금을 연결하고, 지역 기반 제조를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서울 도봉구처럼 상대적으로 소외된 봉제 지역에 대한 지원도 요구된다. 지금까지 주요 정책과 지원이 동대문이나 일부 중심지에 몰린 측면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제조 밀집 지역 전반을 두루 살피는 접근이 필요하다.
패션봉제지원법 발의, 서울시 ‘일감 매칭’ 본격화
정부와 기업 차원에서 봉제 산업을 살리기 위한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지난 1월 14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남근 국회의원은 패션봉제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패션봉제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업계에서는 이 법안이 선언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실제 현장 체감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김 의원이 대표 발의한 패션봉제산업 지원법은 산업 육성 기반 조성을 위한 종합계획 수립, 공동작업장 · 공동재단실 · 공동브랜드 개발 등 공동사업 지원, 판로 확대 지원, 금융 및 세제 지원, 전문인력 양성 등을 골자로 한다. 패션봉제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지원하기 위한 국가와 지자체의 책무를 규정했다.
민간에서도 협력 사례가 나오고 있다. 무신사는 서울시와 함께 ‘서울 패션봉제산업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고, 서울 소재 샘플 · 패턴 · 봉제 업체 약 1000곳과 무신사 운영 브랜드를 연계하는 ‘일감 매칭’도 추진 중이다. 업체들에 일감과 수익을 제공함으로써 서울 시내 제조 기반을 지키고 패션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회복하겠다는 취지다.
패션그룹형지, 동대문 K-패션 전초기지 삼겠다
최병오 패션그룹형지 회장도 동대문을 중심으로 제조 기반과 K-패션 전초기지를 연결하는 행보에 나섰다. 최 회장은 1982년 동대문 의류상가에서 출발한 창업가답게 동대문을 다시 K-패션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지난 2월 12일에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의류제조공동인프라를 방문해 노양호 패션봉제산업연합회 회장, 박건우 동대문의류패션협회 회장, 최상진 한국봉제산업협회 회장 등 지역 단체장 및 봉제업체 대표들과 의견을 나누고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들 봉제 단체장들은 패션그룹형지에 제조공동인프라 활용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했고, 이에 최 회장은 동대문을 중심으로 K-패션을 만들고 나아가 서울시 전역의 봉제인들과 협력 인프라를 구축해 나가자고 밝히기도 했다.
봉제 업계가 요구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해외 생산 반대나 비현실적인 규제가 아니다. 국내 생산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빠른 대응, 시간 절감, 문제 발생 시 즉각적인 수정, 다품종 소량 생산 등 K-제조만의 경쟁력을 일정 수준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 주도권 되찾고 ‘뉴 패러다임’ 열어야
현재 의류 제조업 종사자는 약 8만9000명에 달하며, 이 가운데 59.2%가 서울에 집중돼 있다. 제조 기반이 흔들릴수록 이들 역시 직접적인 생존 위기에 놓이게 된다. 패션 산업의 본질은 디자인에만 있지 않다. 생산 단가가 낮은 해외 생산을 활용하더라도 국내 제조 기반이 일정 수준 유지되지 않으면 언제든 공급망 리스크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제조 산업을 단순한 하청 구조가 아닌 패션 산업의 핵심 인프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본과 이탈리아처럼 ‘메이드 인’ 가치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고 봉제 산업의 처우 개선과 기술력 고도화도 병행돼야 한다. 소비자는 ‘메이드 인 코리아’를 선택하는 것이 자부심 있는 소비라는 인식 확산이 필요하다.
AI와 로봇 등 첨단 제조 기술 도입을 위한 투자와 인력 양성도 늦출 수 없다. 브랜드와 제조가 공존할 수 있는 실질적인 상생 모델 구축이 과제로 남아 있다. K-패션의 화려한 성장 뒤에는 결국 K-봉제라는 제조 현장이 존재한다. 제조가 무너지면 패션산업이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없다. 지금이 바로 K-봉제를 다시 살릴 마지막 골든타임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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