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옷차림은 곧 나의 선언문이다”
![[칼럼]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옷차림은 곧 나의 선언문이다” 27-Image](https://www.fashionbiz.co.kr/images/articleImg/textImg/1762158122889-김정아_칼럼헤드 2 (5).jpg)
철학자는 무얼 입고 다녔을까? 질문이 다소 엉뚱해 보인다. 철학이란 대개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같지만, 철학자도 발이 땅에 닿아 있고, 땅에 닿은 발을 감싸는 신발은 분명 옷의 일부다. 즉 철학자의 사유는 옷과 무관하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맨발로 아테네 거리를 배회했을 때, 그는 이미 하나의 ‘패션 스테이트먼트’를 하고 있었다. 철학자들, 특히 소크라테스처럼 ‘소박한 삶’을 실천하는 이들은 맨발로 다니는 것이 흔했다(플라톤의 〈향연〉이나 다른 기록에서도 소크라테스가 맨발로 다녔다는 언급이 있다). 그것은 소박한 삶의 실천이라는 스테이트먼트 이외에도 “나는 신발 따위에 매이지 않는다. 사유만이 나의 장식이다”라는 외침일지 모른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무심한 옷차림은 철학적 태도의 연장이었다.
루소의 복장도 당시 1760년대 파리에서 유행하던 프랑스 귀족 복식과는 달랐다. 그는 파리 살롱의 세련된 옷차림을 거부하고 긴 로브와 간단한 벨트, 모자 등 산책할 때 입는 간소한 아르메니아식 옷을 즐겼다. 그것은 단순히 편안해서가 아니었다. 문명사회의 위선을 벗어던지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그의 철학을 시각적으로 드러낸 옷차림이었다. 그가 지향하던 자연 상태와 소박한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옷차림이었고, 그것만으로도 파리 살롱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크게 끌었다. 한 벌의 옷이 곧 사상의 포스터였던 셈이다.
여성 철학자의 선구적 이미지를 보여준 이는 조르주 상드였다. 그녀는 당대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던 남장을 즐겨 입으며, 프랑스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바지와 남성용 재킷, 넥타이를 매고 거리를 활보하던 상드는 단순히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에게 부과된 제약을 벗어던지고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주장하는 몸짓이었다. 그 옷차림은 그녀의 문학적 목소리와 겹치며, 사회 규범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자 성별을 넘어선 사유의 표지로 기능했다.
오스카 와일드 또한 옷을 철학의 연장선에 뒀다. 그는 벨벳 재킷, 레이스 셔츠, 해바라기 모양 브로치 등 화려한 복식을 즐겨 입으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보수적 규범을 도발했다. 그의 과장된 스타일은 단순한 치장 이상의 것이었다. 미학과 예술, 삶을 구분하지 않는 ‘예술지상주의’ 철학의 실천이자 유행과 도덕을 동시에 비웃는 아이러니한 선언이었다. 와일드의 옷차림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문학이었고, 시대정신을 비틀어 보여주는 퍼포먼스였다.
이쯤에서 도스토옙스키를 소환하겠다. 철학자이자 위대한 소설가인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옷을 통해 철학을 말했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는 초라한 외투와 해진 구두를 신고 거리를 헤맨다. 그의 겉모습은 곧 정신적 빈곤과 사회적 추락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종종 옷의 세부 묘사 — 예컨대 떨어질 듯 말 듯 얇은 실 한 오라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단추 — 를 통해 인물의 불안정함과 당장 나락으로 떨어져 파탄할 것 같은 인물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그려냈다.
〈백치〉의 미시킨 공작은 스위스 요양원에서 돌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화려한 사교계에 던져진다. 그의 낡고 수수한 옷차림은 곧바로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 초라함은 단순한 가난의 표식이 아니다. 그것은 미시킨이 지닌 ‘순수한 시선’ — 세상의 계산과 이해타산에서 벗어난 인간 존재의 본질 — 을 드러내는 역설적 기호다. 화려한 드레스와 군복, 장식으로 가득한 사람들 속에서 미시킨의 낡은 옷은 마치 철학적 선언처럼 울린다. “나는 이 세계의 외양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인간의 심연을 보려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인물의 옷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사회적 가면을 쓰고, 또 그 가면을 벗겨낼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철학자는 누구일까. 전통적인 의미의 철학자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사상가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현대의 ‘철학자’는 테크 기업의 CEO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수학이나 윤리 대신 알고리즘과 코드로 세상을 설계한다. 흥미롭게도 그들의 옷차림도 하나의 철학을 말한다.
스티브 잡스를 떠올려 보자. 무대에 설 때마다 입었던 검정 터틀넥, 청바지, 운동화. 의도적으로 선택된 단순함이었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음으로써 잡스는 두 가지 메시지를 전했다. 첫째, 옷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지 않겠다는 효율의 철학. 둘째, 자신은 유행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창조한다는 선언. 잡스의 터틀넥은 루소의 아르메니아식 옷처럼 옷 그 자체가 하나의 선언문이었다.
빌 게이츠는 잡스처럼 강렬한 패션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늘 심플한 니트와 셔츠 차림으로 대중 앞에 섰다. 옷보다 아이디어, 외양보다 기술. 그의 평범한 옷차림은 “나는 세상을 바꾸려 하지, 패션쇼를 열려는 게 아니다”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또 다른 테크 CEO들 — 엔비디아 젠슨 황의 가죽 재킷, 마크 저커버그의 회색 티셔츠 — 모두 같은 맥락에 있다. 옷을 단순화하거나 혹은 특정 아이콘을 고집함으로써 자신들의 세계관을 은근히 드러낸다.
이쯤 되면 질문은 분명해진다. 옷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천 조각인가, 아니면 인간 정신의 ‘겉옷’이자 사회적 언어인가? 패션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낯설지 않다. 소비자는 단순히 원단과 재단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해 줄 기호를 산다. 그리고 그 기호는 철학자의 사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철학자들의 옷을 다시 훑어보자. 소크라테스의 맨발은 “나는 무지하다”라는 고백만큼 강력한 퍼포먼스였다. 루소의 간소한 복식은 사회 비판의 선언문이었고, 상드의 남장은 젠더 규범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와일드의 화려한 복식은 예술지상주의의 연극적 선언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낡은 옷과 단추 하나로 존재의 균열을 드러냈다. 오늘날의 테크 CEO들은 티셔츠와 가죽 재킷으로 ‘효율’과 ‘혁신’의 철학을 몸에 새겼다.
그러니 아침마다 옷장을 열 때, 우리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선택을 한다. 오늘 나는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그것은 단순히 색상과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철학을 세상에 말하는 방식이다. 혹은 내 존재로 세상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하는 태도의 표현이다.
결국 패션은 우리를 끊임없이 사유하게 만든다. 아무리 근엄한 철학자도, 아무리 거대한 CEO도 구멍 난 양말과 삐져나온 속옷 때문에 결국 우스꽝스러워지는 순간이 있듯이 패션은 철학 속에 인간적인 허술함을 심는다. 그 허술함 속에서 우리는 더 진솔하게, 더 창조적으로, 자기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오늘의 옷차림은 곧 나의 선언문이다.
당신은 오늘 어떤 옷으로, 어떤 철학으로 세상을 마주할 것인가?
옷은 늘 철학을 말한다. 유행의 파도 속에서도 한 벌의 옷은 인간 존재를 해석하는 언어가 된다. 해진 소매 하나가 사회적 불평등을 고발하고, 단순한 회색 티셔츠가 새로운 시대정신을 대변한다. 패션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유가 직조된 언어이며, 옷감은 철학의 또 다른 페이지다.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5년 11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패션비즈는 매월 패션비즈니스 현장의 다양한 리서치 정보를 제공합니다.
- 기사 댓글 (0)
- 커뮤니티 (0)
.jpg&w=1080&q=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