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 35 AI 시대 ‘패션 인간’ 생존법은
얼마 전 지인이 내게 다섯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처음엔 시큰둥했는데, 마지막 세 컷에 이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사진이 기괴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패션계에서도 사람이 설 자리가 사라지는구나” 하는 울적하고 섬뜩한 예감 때문이었다.
첫 장은 흰 배경 위에 놓인 귀걸이 한 쌍. 다음 사진은 특별히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나처럼 평범한 일반인의 40도 옆모습. 세 번째는 그 얼굴에 귀걸이를 합성한 이미지. 네 번째는 파란 눈을 가진 매력적인 외국인 모델이 귀걸이를 한 컷. 마지막은 같은 모델이 고개를 45도 들어 올리고 싱긋 웃는 전형적인 룩북 포즈였다.
놀라웠던 건 앞의 두 장만 사람이 찍은 사진이었고, 나머지 세 장은 AI가 명령어 입력 후 1분도 안 돼 생성한 이미지였다는 사실이다.
처음 AI 모델 ‘로지’를 보며 ‘귀엽긴 한데 이상하다…’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것이 엊그제 같다. 그러나 이제 로지는 더 이상 화젯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K-pop 신(Scene)에선 이미 K-pop Demon Hunters 유형의 가상 아이돌들이 연습생 시절만 10년 가까이 버틴 인간 아이돌들을 위협하며 음원차트를 싹쓸이하는 게 현실이 됐다.
라면이며 과자를 자정에 마구 털어 넣어도 몸무게는 0.1㎏도 늘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늙지도 않고, 스캔들 위험도 0%인데 팬덤과 매출은 오히려 인간 아이돌 못지않다. 그런 존재를 어느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마다하겠는가. ‘설마’ 했던 미래는 어느새 ‘그렇지, 당연히’의 일상으로 코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패션계라고 다르지 않다. 브랜드를 가진 CEO라면 안다. 룩북 한 번 찍으려면 모델비, 헤어 · 메이크업, 스튜디오, 보정 비용까지 아무리 아껴도 수천만 원은 기본이다. 게다가 사용처에 따라 초상권료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몇 달짜리 룩북 한 권에 들어가는 비용치고는 매우 가혹하다.
그때 번쩍 떠올랐다. ‘이 룩북 작업, AI가 대신 해 주면 안 되는 걸까?’ 그것도 우리 브랜드의 정체성과 감각을 담은 전속 AI 모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직원들에게 당장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의외로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수두룩했고, 우리는 그중에서 고르기만 하면 됐다.
AI 룩북 제작비는 100착장을 기준으로 고작 200만원이라고 했다. 심지어 시즌 중간에 나오는 캡슐 컬렉션 룩북도 ‘착장당’ 가격으로 만들어 준단다. 나는 선언했다.
“올해 안에 우리 브랜드 AI 모델을 만들고, 2026 S/S 룩북은 AI로 간다!”
기술이라면 질색을 하고, 진보라면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뼛속까지 인문학자인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작은 충격이었다. 이미 시계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고, 나는 선택했다 — 인간 CEO지만, 먼저 AI를 선택한 CEO로 살기로.
며칠 후 도착한 AI 후보 모델들은 모두 놀랍도록 멋졌다. 아직 실제 착장을 씌운 룩북은 보지 못했지만, 인간 모델을 뛰어넘는 결과물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느껴졌다.
2026 S/S 우리 브랜드 룩북 속에는 사람이 아닌, 브랜드의 영혼을 학습한 AI 캐릭터가 포즈를 취할 것이다. 스스로 감정을 지닌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인간보다 더 우리 브랜드를 이해하는 ‘척’하며 말이다.
사람 없는 패션계를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 같은 작은 회사에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존재는 다름 아닌 ‘사람’이다. 좋은 직원을 구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들을 가르치고 성장시키고 관리하는 일은 훨씬 더 지난하다. 중소기업의 현실 속에서 어느 정도 일머리를 익히고 경력이 쌓이면, 누구나 더 큰 회사를 향해 날개를 펼치고 싶어 한다. 그 바람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것이기에 붙잡을 명분도 없고 솔직히 말해 붙잡아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때때로 찾아오는 직원들 간의 갈등, 감정의 골, 그로 인한 미묘하고 끈적한 후폭풍들…. 이 모든 것이 시간을 갉아먹고 에너지를 소진하게 한다. 만약 AI가 그 ‘사람’을 대신해 준다면? 직원 채용과 관리라는 거대한 태풍 속에서 조용히 빠져나오는 길, 그토록 간절했던 탈출구가 어쩌면 눈앞에 열릴지도 모른다.
예전 같으면 “말도 안 된다. 꿈 깨라”라고 혀를 찼을 이야기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그 말을 선뜻 내뱉지 못한다.
AI 시대 생존 체크리스트
• 기술을 두려워하지 말고, 데리고 노는 법을 배울 것 : AI를 비롯한 디지털화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다. 머지않아 공기나 물처럼 늘 곁에 있는 것이 되고, 어쩌면 그보다 더 친숙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숨 쉬는 일을 두려워하며 살아갈 수 없듯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겁먹지 말고 일단 데리고 놀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 내 자리는 안전하다는 착각에서 하루빨리 깨어날 것 : AI 초창기만 해도 사라지는 것은 단순 노동, 즉 블루칼라 영역일 것이라 여겼다. 창의성과 감수성은 인간의 마지막 보루라 믿었다. 20세기 초 상징주의자들이 말했듯이 태양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AI는 노동자뿐 아니라 판사, 의사, 변호사, 예술가의 자리까지 대체하고 있다. 결론은 하나다 — 더 이상 ‘어느 자리도 안전하지 않다’.
• 가상 인간과 경쟁할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나만의 ‘존재감’을 구축할 것 : 가상 인간을 두려워하기보다 나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로 삼아야 한다. AI가 나를 대체하게 둘 것이 아니라 AI 덕분에 더 강력하고 뛰어난 ‘새로운 나’가 돼야 한다. 결국 살아남는 힘은 기술보다 내가 가진 고유한 존재감에서 나온다.
• 예술적 감각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할 줄 아는 능력임을 잊지 말 것 : 아름답고 근사한 것을 만들어 내는 감각은 충분히 모방될 수 있다. 그러나 ‘왜?’ ‘무엇을 위하여?’ ‘나는 누구인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하고, 사유하는 능력 — 그 사소하고 철학적인 ‘질문’이야말로 AI 시대에 인간이 인간으로 남게 하는 마지막 생존 무기다.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모델이 사라지고, 포토그래퍼가 사라지고, 뷰티 아티스트가 사라지고, MD가 사라지고, 심지어 CEO인 나조차도 어느 날 버튼 하나로 ‘삭제’될 수 있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기술경쟁의 시대가 아니라 존재의 이유를 질문받는 시대다. 어쩌면 그래서 다시 사람들이 인문학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술은 아무리 완벽에 가까워져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끊임없이 성찰하는 모순덩어리적 생명력은 복제하지 못한다.
우리가 모두 해고될 수 있는 시대이기에 오히려 더 유쾌하고 당당하게 물어야 한다. ‘AI가 다 하는 세상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아니 무엇을 하며 살아남아야 하지?’
답은 아직 모호하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믿고 싶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고, AI는… 불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짧고도 불완전한 생의 틈 사이에서 여전히 ‘왜’라고 질문할 수 있는 ‘용기’ 하나만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묻는다.
“살아 있는가? 그렇다면 계속해서 물어라!”
우리는 어쩌면 질문할 수 있는 마지막 종족일지도 모르니까.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5년 10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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