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정민 | 'AI 필수 시대, 우리의 선택은? “기술의 문제 아닌 철학의 문제”'
2025년 8월호 보그 미국판에 실린 ‘게스(Guess)’ 광고가 패션 업계를 뒤흔들고 있다. 지면에 등장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 보이는 금발 모델이 AI로 생성된 인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독자와 업계는 보그와 게스 모두를 향해 강하게 반발했다. 보그지에서는 그냥 ‘광고’일 뿐 편집 기사에는 AI 모델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지만 다양성과 윤리적 문제 등 여러 논란이 여전히 확산 중이다.
이 논쟁의 뿌리는 패션 업계 의사 결정의 중심인 단순한 ‘미감’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용과 속도가 핵심인 광고 콘텐츠 제작 현장에 AI가 활용되면서 다양성 후퇴와 노동 대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챗GPT가 출시된 2022년 11월 이후 인턴과 신입 사원을 포함해 엔트리 레벨 채용 공고가 약 32% 감소했다는 집계가 나와 우려가 점차 현실이 되고 있음을 입증했다. 국내 기업도 현장 업무에 앞다퉈 AI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직무 교육을 강화하고 있고, 최적의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패션 리테일을 혁신하는 AI
재고와 반품이 항상 문제가 되는 리테일 현장에서 AI 도입은 더 급박하게 사용되고 있다. 잘못된 수요 예측으로 과잉 생산된 재고와 잘못된 상품 배분으로 인한 판매 기회 손실 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글로벌 리테일러, 특히 패스트패션 브랜드와 스포츠 브랜드는 앞다퉈 AI를 활용하고 있다. 수요 예측 - 배분 - 판매를 하나의 연결된 활동으로 인식하고, 기업의 운영 시스템 전체를 재편하는 것이다.
‘쉬인(Shein)’은 신상품을 100~200장 소량 선(先)출시해 시장의 실시간 반응을 분석하고 이를 즉시 증산하는 온디맨드(On-Demand) 상품 개발 시스템을 표준화해 해당 제품의 시장성을 검증했다. 판매 데이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신상품을 판매해야 하는 패션 산업의 본질적 문제를 우회하는 방법으로 예측 리스크를 본질적으로 낮춘 것이다.
반면 글로벌 시장에서 약 5500개의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는 인디텍스는 재고의 효율적 배분을 통한 재고 최소화와 효율 확대가 지상과제다. 전 매장과 전 물류에 부착된 RFID와 통합 재고 시스템(SINT)으로 온 · 오프라인을 단일 재고화해 운영한다. 어느 점포에 있든, 어느 창고에 있든 고객 주문에 즉시 응할 수 있어 예측이 조금 빗나가더라도 재배분하고 보충해 오차를 최소화한다. ‘예측 정확도’뿐 아니라 예측 탄력성을 키운 셈이다.
이와 비슷하게 ‘나이키’는 DTC 전환을 가속화해 2019년 수요 감지 기술과 배분 최적화 기술을 가진 ‘셀렉트(Celect)’를 인수해 어느 지역에, 어떤 유통 채널에, 어떤 SKU를 얼마나 둘지 마이크로 지역 단위 의사결정 역량을 내재화했다. 큰 트렌드의 평균값이 아니라 지역과 채널별 미세 수요를 따라가면서, 품절과 과잉 재고로 인한 과도한 할인을 줄이는 방향으로 오차를 다룬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잘란도(Zalando)’는 소비자가 찍은 사진 2장을 활용해 신체 치수를 추정해 상품별 개인화 사이즈 추천을 제공한 것에 이어 2024년에는 아바타 기반 가상 피팅룸을 활용해 항상 반품의 원인이 되는 ‘맞지 않는 사이즈’의 구매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이드 숫자’가 아닌 개인별 치수와 체형을 기준으로 추천이 돌아가면서, 같은 재고로도 품절과 과잉이 동시에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소비자 맞춤, ‘에이전틱 AI’의 등장
‘생성형 AI’를 넘어 ‘에이전틱 AI’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패션 산업 내에서 AI 활용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인간의 지시에 따라 반응하는 생성형 AI와 달리 에이전틱 AI는 사용자를 대신해 독립적으로 작업을 계획하고 실행해 많은 부문에서 인간을 대신하게 될 것으로 본다. 단순히 차기 시즌의 신상품을 개발하거나, 모델을 대체하는 이미지를 생성해 내는 것을 넘어 개개인의 취향에 맞춰 소비자 접점에서 구매 버튼을 누르게 하는 것이다.
영국의 애슬레저 브랜드 ‘스웨티베티(Sweaty Betty)’는 AI를 활용해 고객 관리, 소비자 설문조사, 소셜미디어, 리뷰 데이터 분석 등으로 소비자를 그룹으로 세분화하고 각 소비자에 최적화된 마케팅 문구를 개발해 웹사이트에 자동 게시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예를 들어 “레깅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아침 러닝할 때 자주 사용하는데, 다른 브랜드보다 가격이 좀 비싼 것 같아요”라고 고객이 쓴 리뷰를 바탕으로 이 소비자를 자동적으로 특정 소비자 그룹으로 세분화한다. 세분화한 소비자를 타기팅한 메시지인 “당신처럼 아침 러닝을 즐기는 분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프리미엄 레깅스, 가격 대비 가치가 충분합니다”가 나타나도록 웹사이트를 설계하는 방식이다.
미국의 백화점 삭스피프스애비뉴(Saks Fifth Avenue)는 세일즈포스와 협업해 기존의 챗봇 스타일링 기능을 강화한 서비스를 출시했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챗봇에 한 사이즈 관련 질문에 AI 에이전트가 매장 재고 및 고객 프로필 데이터를 활용해 처리하는데, 기존 챗봇의 판에 박힌 대답이 아니라 소비자와의 대화 중에 수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답변을 생성한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옷을 반품하고 생일에 브로드웨이 뮤지컬 관람을 위해 다른 제품을 구매해야 하는 소비자에게 “제품이 맞지 않아 죄송합니다. 저희 플래그십스토어에서 XS 사이즈를 예약해 드릴 수 있습니다. 생일을 맞아 미드타운에 오실 예정이니 저희 매장을 방문해 액세서리를 착용해 보시겠습니까?”라는 형태로 마치 인간 CS 담당자와의 가벼운 대화라고 착각할 만한 응대를 한다.
일자리 위협? AI와 인간의 협업 가능성
이쯤 되면 앞서 AI 모델의 등장으로 인해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것을 넘어 나의 일자리가 걱정될 지경이다. 과연 정말 우리 인간의 일자리를 AI가 모두 대체하게 될까? AI 기술의 시대 인간의 역할은 무엇일까?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인간이 아직까지는 인간과의 대면 활동을 여전히 좋아하고, 또 특별하다고 느낀다는 사실이다. 물론 요즘의 젊은 세대는 키오스크와 플랫폼에서 주문하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지만, 아직 인간의 접객이나 소통은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면 이 훌륭한 혁신 기술을 인간이 더 인간다운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패션 산업은 아니지만 미국의 농기구를 판매하는 트랙터 서플라이(Tractor Supply)에서는 고객에게 최고의 브랜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 AI를 활용한다. 미국 전역에 23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는 이 유통업체는 농촌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품목을 취급한다. 작업복부터 용접기, 얼음낚시용 기구, 트랙터용 타이어까지 방대한 품목으로 인해 판매 사원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모든 품목의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트랙터 서플라이의 경영진은 고객 경험을 강화하기 위해 ‘헤이 구라(Hey GURA)’라는 AI 기반 서비스를 2023년 시범적으로 도입했다. 트랙터 서플라이의 모든 직원은 웨어러블 기기와 연결된 인이어를 소지하고, 고객의 질문에 답변하기 어려울 때마다 헤이 구라에 질문해 전문적인 답변을 빠르게 얻는다.
애플의 시리나 아마존의 알렉사와 유사한 방식으로 구동되는 헤이 구라는 트랙터 서플라이에서 취급하는 상품에 대한 모든 정보를 상세하게 탑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관 지식과 실시간으로 본사에서 내려오는 다양한 마케팅 프로그램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최적의 답변을 뽑아낸다. 지금 막 입사한 신입사원도 최상의 접객은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의 접객은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당연히 사용자인 내부 직원의 높은 만족도와 함께 적극적인 참여와 피드백 덕분에 헤이 구라의 데이터베이스는 더욱더 강화되고 있다.
기술 경쟁의 시대를 넘어 원천 데이터 경쟁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현재 시장 상황에서 트랙터 서플라이는 경쟁 기업 대비 더 쉽게 양질의 데이터베이스를 모으고 있다. 대부분의 개발 기술이 고객 접점에 직접 적용되는 것과 달리 헤이 구라는 판매 직원이 고객을 대할 때 직면하는 문제에 집중했다. 기술의 도입으로 자신의 일자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걱정을 덜고 내부 고객의 애사심을 높였다. 직접 정보를 찾아야 했던 소비자들의 브랜드 경험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강화됐다.
혁신 기술의 활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기술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할지 그 사용처를 정하는 일이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게 되는 기술이 우리 기업에, 우리 산업에,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지 고민해야 한다. 이런 고민 없이 브랜드를 운영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다.
<기사 제공 : 트랜드랩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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