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⑭ - 이탈리아편 Ⅲ'
이탈리아 프리미엄 패딩 브랜드 ‘에르노(Herno)’는 어떻게 국내에 자리 잡았을까? 지난 호에서 에르노를 둘러싼 ‘어카운트 전쟁’ 중 1라운드를 장식한 갤러리아백화점 이야기를 한 것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갤러리아가 떠난 빈자리에 들어온 현대의 에피소드를 풀어보려고 한다.
2014년 에르노 본선 스테이지 2의 세 선수는 ‘스페이스 눌’, 신세계, 현대라 할 수 있겠다. 이 중 에르노의 어카운트 가운데 하나가 되기 위한(결국은 독점을 염두에 두었겠지만) 밑 작업에 매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고, 가장 많은 돈을 쓴 곳은 바로 현대였다. 그런데 현대 역시 갤러리아가 범한 우(愚)를 되풀이하게 된다. 에이전트의 의견을 에르노 본사의 의견이라 믿고 에르노 에이전트의 마음에 들려고 무던히 노력한 것이다.
여느 다른 나라에 비해 이탈리아에는 패션 브랜드를 관리하는 에이전트가 정말 많다. 그 이유는 브랜드 수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트레이드 쇼는 며칠을 돌아도 제대로 다 못 볼 정도로 규모가 크다. 브랜드라면 한 지식 한다는 필자조차도 듣도 보도 못한 이탈리아 브랜드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이 많은 브랜드는 해외 판로를 찾기 위한 한 방편으로 여러 에이전트와 계약을 맺는다. 한국처럼 패션산업이 발달한 나라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며, 이탈리아 현지에 사는 한국인 에이전트를 고용한다. 여러 계약 형태가 있겠지만 무명의 이탈리아 브랜드들은 일정한 급여제가 아닌, 팔리는 액수만큼 수수료를 주는 식의 계약을 많이 하기 때문에 브랜드 입장에서도 부담이 없다. 여기서 패션 브랜드를 담당하는 에이전트의 역할을 살짝 짚고 넘어가겠다.
에이전트는 브랜드와 다양한 이해 관계자 간(주로 바이어, 또는 바잉 회사)의 중개자 또는 대리인 역할을 해 브랜드 비즈니스의 원활한 운영을 촉진한다. 한마디로 자기가 담당하는 브랜드의 제품을 홍보 및 유통하고,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혹은 국가)의 소매업체 및 부티크에 판매하는 일을 한다.
또한 바이어들과 관계를 맺고 브랜드를 대신해 판매 조건 등을 협상한다. 담당하는 시장의 동향과 소비자 선호도 및 경쟁사 활동을 모니터링하는 등 바이어로부터 피드백을 받고, 이 정보를 패션 브랜드와 공유해 시장이 원하는 컬렉션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려 노력한다. 또 에이전트는 소매업체(바이어와 어카운트들)의 주문 리스트(Order list)를 취합하고, 브랜드에 주문을 이행해 주문 확인서(Order Confirmation) 등을 보낸다. 소매업체와 브랜드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해 원활히 배송될 수 있도록 통관 및 배송 일정 조정 등 물류 및 유통에도 도움을 준다.
고객 관계 관리(CRM)를 하는 것 역시 에이전트의 중요한 역할인데, 우리나라 실정에 어두운 해외 브랜드로서는 이러한 에이전트의 의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가까운 곳에 어카운트를 오픈해도 상충되고, 또 백화점과 로드숍의 가격차도 조절하는 등 관리해야 할 것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브랜드가 인기를 얻게 되면 신경 써야 하는 일은 더 늘어난다. 그렇기에 이런 중간 업무를 담당하는 에이전트의 파워 또한 막강해질 수밖에 없다.
어떤 브랜드가 에이전트와 계약할 때는 에이전트를 통해 들어온 바잉 버짓(Buying Budget)만 수수료를 받는 등 다양한 종류의 계약이 있다. 에르노의 경우에는 무명이던 시절, 한국의 개인 에이전트와 ‘에어리어 계약’을 해 놓은 상태였다. 이는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흔한 계약 형태다. 예를 들면 에이전트를 통하지 않고 브랜드를 직접 콘택트했던 필자 같은 바이어도 한국이라는 에어리어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 에이전트의 고객으로 묶이게 되는 셈이다.
또 하나 알아둬야 할 것은 ‘에이전트는 하나의 브랜드만 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 브랜드 에이전트는 적어도 수십 개, 유명하지 않은 브랜드까지 포함하면 수백 개까지도 담당한다. 또 브랜드와의 개별 계약 뿐 아니라 여러 브랜드를 모아놓은 쇼룸들도 계약해 담당한다. 문제는 에르노 에이전트 역시 다른 수많은 브랜드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바잉은 정말로 전문가의 영역이다. 특히 멀티숍 바잉은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백화점 본사에서 갑자기 남성 액세서리 편집숍을 하라는 명령을 받으면 바이어들은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 사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 가장 쉬운 방법은 많은 브랜드를 가진 에이전트를 통해 브랜드를 사 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값이 비싼 것도 문제지만(에이전트 수수료가 우리 주머니에서 나가지 않는 것일 뿐 물건값에 다 포함돼 있다), 좋은 브랜드를 사 올 수도 없고, 브랜드를 선택하는 안목도 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브랜드를 따내려면 에이전트와의 조건을 맞추기 위해 그가 관리하는 타 브랜드의 바잉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내 눈에는 정말 오더할 만한 브랜드가 없었기에, 그가 에이전트로 있는 다른 RTW(Ready To Wear, 기성복 의류) 브랜드를 소량 오더했고, 갤러리아 역시 에이전트가 관리하는 남성 이탈리아 브랜드를 소량 바잉하기도 했는데, 현대의 경우 에르노를 전개하기 위해(라고 쓰고 ‘에이전트의 마음에 들기 위해’라고 읽는다) 적극적으로 많은 브랜드를 바잉했다.
그 결과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에 유럽 수제화 ‘M’ 편집숍과 유럽 남성 가죽 잡화 ‘R’ 편집숍이 어느 날 들어섰다. 하지만 ‘M’ 편집숍은 매출이 저조해서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그런데 이때 가장 슬퍼한 사람은 돈 들여서 바잉한 현대가 아니라 하루 아침에 거액의 수수료를 잃게 된 에이전트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R’ 편집숍 역시 에이전트를 통해 산 브랜드들의 매출은 좋지 않았고, 대신 위탁으로 운영했던 리모와(Rimowa)와 악어가죽 소품 덕분에 운영을 이어 나갔다.(그렇다. 지금은 LVMH 회장 아들이 운영하는 그 리모와가 그때는 위탁으로 매장에 작게 들어와 있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여러모로 공들인 덕에 드디어 현대가 에르노 바잉에 성공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현대백화점 본점 한 곳이 아니라 무역센터점까지 두 매장을 오픈한다는 것이었다! 메인 지점 한 곳 먼저 오픈하고 실적이 좋으면 점차 늘려나가는 것이 안전한 선택일 텐데 왜 그런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매장을 두 군데 오픈하면(즉 바잉 버짓이 커지면) 너희에게 독점을 줄 수도 있다는 에이전트의 말을 에르노 본사의 의견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으리라. 갤러리아와 똑같은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초창기 에르노는 국내에서 판매하기에 부적합한 아이템들이 있어서 잘 골라야 했기 때문에 바잉하기가 까다로웠다. 얇은 경량 소재 패딩 중 옅은 컬러의 옷은 패딩 안에 검정 깃털이 섞여 있는 것이 보였는데, 유럽 고객과 달리 우리나라 고객은 ‘색이 고르지 않고 얼룩처럼 보인다’라는 이유로 불량 아니냐며 클레임을 걸곤 했다.
에르노를 국내에 처음 들여오면서 필자가 겪은 시행착오를 나는 현대에게 전해주고 싶어서 진심으로 조언했다. ‘매장은 하나씩 오픈하는 게 좋다’, ‘꼭 독점 바잉이 목표일 필요는 없다’, ‘바잉은 조심해서 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 입장에서는 경쟁자인 필자가 하는 말을 어떻게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누군가는 오지랖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진심이 잘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아서 매우 아쉬울 뿐이었다.
2014년 F/W 시즌, 계획대로 현대백화점 본점과 무역센터점에 에르노 모노 매장이 오픈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기대에 미치는 실적을 내지는 못했다. 게다가 다수의 불량 건으로 클레임이 들어와 에르노 본사의 심기도, 또 에이전트의 심기도 불편한 상황이었다. 결국 현대는 에르노를 2014년 F/W, 2015년 F/W 두 시즌 만을 진행했다. 그다음 해인 2016년, 신세계의 독점 계약 소식이 들려왔다. 신세계는 어떻게 독점을 따냈을까.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스토리(RHK)
- 패션MD :Intro(RHK)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3년 12월호에 게재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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