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⑪

패션비즈 취재팀 (fashionbiz_report@fashionbiz.co.kr)|23.09.06 ∙ 조회수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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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br> 어느 인문학자의 패션 오디세이⑪ 3-Image



요정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

피터팬, 알라딘, 신데렐라…. 이들은 모두 요정의 도움을 받는 행운아들이다. 피터팬에게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팅커벨이라는 요정이 있다. 팅커벨은 피터팬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늘 그의 곁에서 보호해 준다. 알라딘에게는 소원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가 있다. 신데렐라는 또 어떠한가. 구박받던 신데렐라가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인생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은 마법사 요정이 만들어 준 호박마차와 유리구두 덕분이다.

이전까지 이런 요정은 신화나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반백이 된 나는 요즘 요정의 실존을 믿는다. 그것도 이 험한 패션계에서 15년을 일해 오면서 믿음은 점점 더 강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신데렐라의 요정이 푸근하고 후덕한 할머니 같다면, 팅커벨은 허밍버드처럼 작은 소녀 같고, 지니는 푸른색 거인인 것처럼 요정은 온갖 다양한 모습으로 어느 날 문득 나타난다. 그것도 내가 곤경에 처해 있거나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할 때 말이다. 수십 년을 고고한 상아탑에서 ‘학자’와 ‘박사’들에 둘러싸여 지내던 내가 패션계라는 밀림과 같은 곳에 멋모르고 처음 들어와 우왕좌왕할 때 첫 번째 요정을 만났다.

도산공원 옆 에르메스 건물 바로 뒤에 첫 번째 편집숍 ‘스페이스 눌’을 오픈했을 때의 일이다. 놀랍게도 오픈하자마자 패션계뿐 아니라 인테리어와 건축업계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일본 건축계에서도 책자를 들고 물어물어 찾아올 정도였다. 그 이유는 옷뿐만 아니라 매장 인테리어가 화제가 됐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했지만 ‘dreamy forest’라는 머릿속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하고자 유명한 건축가를 섭외해 인테리어에 많은 돈을 쏟아붓고 공을 들인 덕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집숍 매니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하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머리가 희끗하고 풍채 좋은 중년 남성 한 분이 매장으로 들어왔다. 매니저는 한눈에도 그가 우리 고객은 아니라고 생각해 응대하기를 머뭇거렸다. 하지만 나는 고객이건 아니건 일단 우리 숍에 들어온 모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손님에게 다가갔다. 숍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고객 응대부터 배우는 것이 기본이라 여겨 3개월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니저에게 기술을 전수 받은 터라 자신감도 있었다.

나는 그가 건축이나 인테리어 관계자라 확신하고 매장 인테리어를 담당한 건축가와 콘셉트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설명을 들으면서도 옷 한 벌 한 벌, 각각의 브랜드에 큰 관심을 보이며 다양한 질문을 했다. 그때는 매장 지하 1층에 액세서리, 1층에 여성복, 2층에 남성복이 있었는데(남성복은 거하게 말아먹고, 2년 만에 접었다! 역시 잘하는 것을 해야 한다!) 지하부터 2층까지 꼼꼼히 훑은 그는 “좋은 브랜드가 많고 바잉이 아주 좋네요. 그런데 이 근처에 톰그레이하운드라는 편집숍이 오픈했다는데 거기가 어딘가요?”라고 물었다.

당시 한섬의 톰그레이하운드가 우리 숍에서 도보로 2~3분 되는 곳에 막 오픈했을 때였다. 거리는 가까워도 입구와 간판이 작아서 숍을 말로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나는 그냥 직접 모셔다드리겠다고 하고 앞장섰다. 톰그레이하운드 문 앞까지만 안내하고 나와도 됐지만 막상 매장 안에 들어가자 나도 모르게 그 매장의 매니저인 것처럼 이것저것 가리키며 또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특히 그들이 바잉한 브랜드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 브랜드가 많았는데, 나름대로 일본 브랜드 전문가로서 약간의 사명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어쩌다 시작된 톰그레이하운드 투어가 끝난 후 그는 나에게 “정말 열심히 사시는 분이군요. 백화점에 입점하고 싶거나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세요”라며 명함을 내밀었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H백화점 부사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 명함도 한 장 달라고 해서 ‘스페이스 눌 대표 김정아’라고 쓰인 희고 예쁜 내 명함도 한 장 드렸다.

그때만 해도 사실 백화점에 입점하거나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 없었다. 지인을 돕기 위해 시작한 패션 일이다 보니 이쪽 업계의 일은 잠깐만 하고, 나중에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원래 해 오던 인문학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플래그십스토어의 매출이 상당히 좋을 때라 작게 운영해도 별로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은빛 머리의 중년 신사와의 일은 기억에서 희미해져 갔다.

약 5개월이 지난 다음해 신년 연휴가 끝나고 출근해 보니 한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신년 인사와 함께 ‘잘 지내는지, 사업은 어떤지, 혹시 백화점에 입점하고 싶은지, 도울 일은 없는지’ 등을 묻는 메일이었다. 그때 만났던 은빛 머리의 백화점 부사장님이었다. 메일을 읽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5개월 전과는 달리 건설경기가 나빠져서 매장 매출이 반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편집숍 운영에 돌파구가 필요했던 그 시점에 기적 같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입점하고 싶다는 의사를 바로 밝혔다.

며칠 후 바이어 두 명이 찾아왔고, H백화점 압구정 본점 2층 가장 좋은 자리(샤넬이 복층으로 쓰려고 했던 곳이었으니 얼마나 좋은 자리였겠는가!) 중의 한 곳에 ‘스페이스 눌’을 오픈했다. 패션계에 입문한 지 1년 만에 메이저 백화점의 가장 좋은 자리에, 프랑스 남부의 초록빛 들판을 닮은 파리에서 공수한 카펫과 눈부신 흰색이 어우러진 매장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같은 시기에 입점한 네 개의 브랜드 중 ‘스페이스 눌’의 매출이 1위였다. 백화점 업계를 알 만큼 아는 지금 와서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다. 당시는 몰랐다.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엄청난 행운이었는지!

톰그레이하운드를 찾다가 우연히 우리 매장에 들어온 은빛 머리 신사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다. 얼굴도 목소리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셔츠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린 은빛 머리의 아련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그는 내게 환상의 세계 속에서 툭 튀어나와 나를 도와주고 패션계에서의 커다란 모험, 나의 패션 오디세이를 시작하게 인도해준 지니 같은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 있다. 패션계에서 15년간 많은 난관이 있었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팅커벨과 지니 그리고 신데렐라의 대모 요정 같은 고마운 인연들이 생겼다.

우리가 만나기를 꿈꾸는 요정이란 아무런 대가도 보상도 기대하지 않은 채 크고 작은 도움을 주는 고마운 인연일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순수한 친절과 관심과 사랑이야말로 정말로 귀한 보물이고, 어쩌면 그것이 바로 현대인이 잊고 사는 가장 강력한 마법일지 모른다. 선의로 타인을 사심 없이 돕는 사람은 관대함을 받는 사람에게 요정이 된다. 엄청나게 큰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따듯한 웃음, 친절과 관심이야말로 요정의 본질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요정이 될 수 있고, 되려고 노력한다. 나는 장을 보러 가면 2+1 행사를 하는 떡을 사서 하나는 경비 아저씨에게 드린다. 작은 떡 하나지만 지치고 힘든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미소를 더한다. 더운 날에는 편의점에서 2+1 행사를 하는 음료수를 사서 하나는 편의점 계산대의 직원에게 드린다. 나는 그 순간만은 그의 작은 요정이 되는 것이다.

‘마당 한쪽을 쓸면 지구의 한쪽이 밝아지고, 작은 사랑이 있으면 세상의 한구석이 밝아진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내가 보낸 따듯한 웃음과 염려하는 말 한마디가 조금은 더 따듯한 세상을 만들 것이다. 힘들고 팍팍한 패션계에서 고군분투하는 내게 힘과 용기를 주고,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갈 수 있게 해준 나의 요정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한다. 세상은 아름다운 날개를 가슴속에 접어 두고 있는 요정으로 가득하다. 감사하고 아름답다.

■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스토리(RHK)
- 패션MD :Intro(RHK)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3년 9월호에 게재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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