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패션 희망고문* 언제까지…
빅3 유통 압력(?)에 수입 브랜드 싹쓸이?
* 희망고문 : 프랑스 소설가인 빌리에 드 릴라당이 쓴 단편소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La torture par l’esperance)>에서 나온 표현. 어떻게 해도 절망적인 결과만이 기다리는 극적인 현실 속에서 작은 희망이 주어짐으로 인해 오히려 더 괴롭게 되는 상황을 일컫는 단어. 희망이 아예 없다면 모든 기대를 포기할 수 있겠으나, 약간의 가능성이 보이면 그것에 모든 것을 걸고 절망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려는 인간의 심리를 반영한 단어.
“파리 · 밀라노 · 뉴욕이 아니라 요즘은 전 세계 어딜 가나 한국 패션업계 사람을 만나요.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스코틀랜드, 북유럽 국가 소도시, 심지어 체코와 루마니아까지 한국 패션계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곳에서 마주치는 분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는 새로운 브랜드를 찾으러 나왔다고 하더라고요.”(수입 패션 A업체 사장)
“피티우모를 보러 오랜만에 이탈리아 출장을 다녀왔는데 한국 사람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어요. 남성복 관계자들만 찾던 트레이드 쇼인데, 올해는 관련 없는 분들도 많아 의외였어요. 백화점에서 수입 브랜드를 가져오라는 은근한 압력을 받는다고 하더라고요.”(브랜드 라이선스 대행 B업체 사장)
“새로운 브랜드 상담 차 출장 나갔는데, 이미 한국 회사가 앞서 방문했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작은 브랜드고 한국까지 진출할 수준이 안 되는 곳이라 당연히 우리가 처음이려니 했는데 당황했지요. A급 백화점에 매장을 낼 계획을 밝혔다 하더라고요. 요즘 한국 패션업체들이 해외 시장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모양인데 좀 과하지 않나 싶습니다.”(패션 전문업체 C업체 사장)
새 브랜드 찾아 북유럽 소도시까지 원정
지금 한국 패션 유통업계는 수입 브랜드 열풍이 도를 지나쳐 과열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이 글로벌 패션 격전지로 변모하는 한편 국내 패션기업들이 해외 브랜드 사냥꾼이 돼 가는 형국이다.
이미 삼성패션 · 신세계인터내셔날(이하 SI) · 한섬의 수입 경쟁 불꽃이 재점화됐고, 이 흐름에 동참해 온 LF와 코오롱 등 대기업은 수입 전략을 더욱 강화하며 달려 나가고 있다.
패션 전문기업으로 적극적인 수입 비즈니스를 확장해 온 아이디룩과 바바패션도 틈새의 주도권을 위해 더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이 밖의 중소 · 소기업들은 앞선 전문업체를 거울 삼아 해외 브랜드로 속속 눈을 돌린다.
브랜드를 만들어 오프라인에서 론칭하는 것은 여러 모로 경쟁력이 약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나온 솔루션이 수입인 것이다. 이런 양상은 여성복 남성복의 고가존, 컨템퍼러리에서 가장 활발했지만, 그동안 수입보다는 스트리트 브랜드로 많이 전환된 캐주얼, 스포츠존,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매출을 견인함으로써 압박을 좀 덜 받은 골프 · 아웃도어 조닝도 사정은 비슷하다.
백화점, 해외 브랜드 찾아오지 않으면 철수!
이런 상황을 가장 부채질하는 것은 신세계 · 롯데 · 현대 빅3 유통의 MD 전략이다. 무조건 뉴(수입) 브랜드를 찾아오라는 요청(권유? 압력?)에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해외 브랜드를 찾는 데 너도나도 혈안이다. 과연 수입 비즈니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일까? 이런 의문과 함께 국내 패션 기반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되는 분위기다.
삼성패션이 도입한 ‘메종키츠네’와 ‘아미’ 같은 컨템퍼러리 브랜드들이 히트와 볼륨화에 성공하고, 아이디룩의 ‘APC(아페쎄)’가 메인 라인에 이어 골프라인이 시장 진입에 성공하면서 비슷한 종류의 브랜드를 찾느라 국내 기업은 유럽 패션계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 과거의 빅네임(유명) 브랜드에서 빅(굿) 프로덕트로 넘어가는 양상도 보여준다.
삼성패션 · SI · 한섬, 수입 경쟁 불꽂 재점화
새로운 브랜드가 끊임없이 출몰하는 유럽의 패션 생태계상 관심을 가질 만한 대상은 매년 생기기 마련. 아직 국내 들어오지 않은 브랜드 외에도 유명 브랜드에 납품, 생산 기반이 탄탄한 기업이나 요즘 막 뜨는 브랜드까지 범주가 확장되는 것은 물론이다.
접촉하는 지역도 서유럽 중심에서 북유럽과 동유럽 소도시로, 아시아에 수출을 하지 않거나 한국 진출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브랜드까지 넓어진다.
이에 따라 해외 브랜드 리서치와 연결을 전문적으로 하는 대행업체는 요즘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오랜 코로나 기간 개점휴업의 시기를 보낸 이들은 갑자기 ‘괜찮은(?) 해외 브랜드를 찾아 달라’는 문의와 요청에 현기증이 날 정도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다. 구색만 맞춰 여건에 맞지 않는 브랜드를 소개하거나 수입 비즈니스 능력이 없는 국내 기업에게 브랜드를 제안하거나, 반대로 글로벌 비즈니스를 할 수준이 안되는 해외 브랜드를 그럴듯하게 포장해 한국 기업에 연결해 주고 덜컥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국내 브랜드 성공 가능성 낮으니 수입이 답?
대기업 입장에서는 남(타사)이 갖고 가면 잠재 경쟁자가 될 테니 미리미리 ‘침 발라 놓자’는 의식도 있다. 이미 삼성 · 한섬 · SI는 국내 수입시장 도입기와 성장기에 동일 브랜드를 놓고 기싸움을 해 봤고, 그 결과 향후 판도에서 우열이 가려지던 경험이 있다 보니 이에 가장 민감하다.
웬만큼 지명도가 있거나 기반이 있는 글로벌 브랜드의 경우 어느 정도 한국 시장에서 기본을 다지고 나면 직진출로 선회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경험도 여러 번 해본 대기업군은 더 적극적이다. 지금 뜨고 있는 브랜드에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것은 물론 향후 이를 대체할 잠재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기 위해 전담팀을 더욱 강화해 가동 중이다.
이들은 라이징스타 브랜드나 머지않아 뜰 만한 브랜드, 아직 수입군이 활성화돼 있지 않은 복종의 브랜드를 전방위로 찾으러 다닌다.
대기업, 잠재 경쟁자 막자 ‘침 바르기 전략’
중저가존에서 대중적인 국내 브랜드로 성장한 기업들까지 이런 흐름에 가세한 것은 백화점의 요구를 받거나 스스로 머지않아 백화점에서 퇴출될 것 같은 낌새를 채고 이에 대비하려는 방편인 셈이다.
이런 기업들은 글로벌 네트워크나 브랜드를 찾는 안목과 바잉능력을 갖춘 팀 구성 등이 약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대기업과 전문업체의 선점 경쟁에 덜 치이는(?) 브랜드를 노크하는 경우가 많다.
해외 기업 중에서도 중소 브랜드나 아직 힘이 약한 대상을 찾는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앞서 글로벌 비즈니스를 해온 유럽 패션업계 입장에서 그리 크지도 않은 한국 패션업계 정보는 뻔한 수준이다. 한 다리 건너 한국 기업과 거래를 해봤거나 접촉해 본 경험치가 쌓인 상황. 웬만한 기업은 한국 패션 유통을 파악하고 있는 데다가 관련 기업들에 대해 A~E까지 등급을 매겨놓았다.
SI · 삼성 0순위, 한섬 · LF · 코오롱도 1순위
이들의 리스트에서 오랫동안 수입 비즈니스를 해온 SI · 삼성은 단연 넘버원이고, 전 삼성맨인 박철규 대표가 수장으로 있는 한섬을 비롯 코오롱, LF가 그 뒤를 잇고 있다. 꽤 오랜 시간 수입 비즈니스에 공을 들여온 데다 최근 성공적인 결과를 낸 아이디룩도 상위에 포진돼 있다.
바바패션도 ‘파비아나필리피’ 시절부터 조용히 수입 비즈니스를 성공시켜 온 회사다. 최근 오프라인 전개에 관심이 없고 온라인에 집중하는 리앤한도 ‘골든구스’부터 시작해 여러 브랜드를 도입해온 업체로 한국의 파트너 희망 리스트 상위에 올라 있다고. 이런 기업에는 오히려 자기네 브랜드를 수입해 달라는 요청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해외 기업 입장에서 국내 중견 혹은 중소기업이 문을 두드리면 상담에 흔쾌히 응하긴 하지만 이들의 리스트에는 앞서 거론한 기업들이 상위에 올라 있어 좋은 소식을 기대하기 어렵다.
‘아미’ ‘메종키츠네’ ‘APC’ 성공 샘플 삼아
국내 기업에 수입 브랜드를 가져오라며 이에 집착(?)하는 백화점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다. 코로나19 기간을 거치며 백화점은 더더욱 돈 있는 고객에 집중해야 하는 필요성과 함께 새로운 고객, 즉 글로벌 감각을 이미 갖고 있는 MZ세대를 끌어들여야 하다 보니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욕구가 더 커졌다.
MZ세대는 신체 비율이 좋아 과거 핸디캡이었던 유럽 사이즈에도 무리가 없다는 점 또한 과거와는 달라진 양상이다. 게다가 더현대서울의 히트에 이어 판교점의 리뉴얼까지 성공시킨 현대백화점은 이 경험을 전 점으로 확대하다 보니 수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에 한층 자극받은 경쟁 백화점들은 새로운 콘텐츠가 아니면 고개를 돌리는 형국. 수입 혹은 그동안 백화점에 구성되지 않았던 조닝이나 브랜드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유통 측의 행보를 바라보는 국내 브랜드들 입장에서는 수입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명품 브랜드에서 컨템퍼러리로 이어진 수입 경쟁이 카테고리 킬러, 스트리트 브랜드, 스포츠, 디자이너, 스몰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확산될 수밖에 없다. 해외 기업 입장에서 한국의 뜨거운 발걸음은 아주 반갑다. 상대를 골라 가며 거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디룩 · 바바 등 리딩 전문기업 ‘질쏘냐’
최근 한국이 명품업계의 큰손이 된 것도 이런 흐름에 한몫했다.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한국인의 명품 소비가 전년대비 24% 증가한 168억달러(약 22조원)라고 추정했다.
1인 기준 325달러(약 42만원)로 미국 280달러, 중국 55달러를 크게 웃돈다. 이는 곧 한국이 글로벌 패션 기업 입장에서 돈이 되는 확실한 시장이라는 것을 뜻한다. 서울이 핫한 도시가 된 것도, K-POP 등 K-컬처의 부상도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를 지나면서 유럽 패션기업도 재편되는 가운데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한국을 성숙된 시장을 가진 아주 좋은 판으로 본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에게 한국은 이해하기 힘든 시장이기도 하다. 어느 파트너와 사업을 하느냐에 따라 덜 성숙한 브랜드가 확 뜨기도 하고 충분히 검증된 브랜드가 잘 안 팔리기도 하는 등 명암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파트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부추긴다.
라이선스 비중↑ 수입 = 돈 되는 비즈니스로
더 중요한 것은 과거와 달리 수입이 ‘돈이 되는 비즈니스’가 됐다는 사실이다. 요즘 수입 브랜드는 파트너사인 국내팀에서 일부 상품을 기획 혹은 기획 · 생산하면서 수입 겸 라이선스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삼성과 아이디룩 등에서 이런 라이선스의 성공 사례가 많은데 국내 기업의 실력을 인정받아 현지화 전략을 잘 풀어내면서 일어난 변화다.
라이선스의 상품 구성비는 통상 25~30%지만 판매 결과는 라이선스가 40%까지 가기도 한다. 볼륨화하기 쉬워졌다는 것인데 이런 시스템이 선순환되면서 수익성도 좋아졌다. 결국 실력이 뒷받침되면 충분히 돈이 된다는 결론이 난다.
하지만 함정도 있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아이디룩의 경우 지금의 성공을 이루기까지 20년이 걸렸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초기 이들을 뒷받침한 탄탄한 유럽 현지팀도 크게 기여했다. 그만한 투자(시간과 돈)가 따라줬다는 것이다.
빅3 유통, 자사 브랜드에 노른자위 땅 할애
요즘 수입 비즈니스로 짭짤한 수익을 내고 있는 바바패션도 알고 보면 이 사업에 10년 이상 공을 들였다. 역시 안목 있는 유럽 파트너가 있기에 가능했다. 최근 아이디룩, 바바 출신들이 LF 등 대기업으로 이동하면서 이들의 전략도 노출될 수밖에 없겠지만 사람 한두 명만으로 노하우가 금방 생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더불어 더 중대한 화두가 있다. 언제까지 국내 기업들은 백화점의 MD 개편이라는 명목하에 좌지우지될 것인가. 이 희망고문에 언제까지 몸을 맡길 것인가? 국내 패션 역사상 백화점과 패션기업은 콘텍스트와 콘텐츠라는 암수 한 몸으로 오랜 기간 함께 성장해 왔다. 하지만 빅3 유통이 모두 스스로의 콘텐츠(자사 브랜드)를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현대(한섬)와 신세계(SI)는 충분한 콘텐츠를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고 가장 좋은 자리를 그들에게 내어준다. 롯데GFR은 아직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지만 이런 기능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핵심 콘텐츠를 스스로 해결하는 백화점의 현재는 과거와는 분명 다른 스탠스다.
언제까지 백화점에 내 브랜드 미래 의지?
이런 상황에 패션기업이 오로지 백화점의 MD 전략에만 의지해 근시안으로 브랜드의 생사를 결정한다는 것이 과연 시대에 맞는 의사결정일까. 일례로 코로나19 기간 골프 시장 확장에 따라 적잖은 기업이 출혈을 감수하며 신규 브랜드를 론칭해 백화점 매장을 겨우 방어(유지)했다. 하지만 영 골프인구가 훅 빠지고 한 시즌 만에 명암이 엇갈렸다.
지금은 상위 몇 개를 제외하고는 매출이 오르지 않아 계륵 신세다. 백화점 MD 구성상 남아 있긴 하지만 오래 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는 브랜드도 적지 않다. 포트폴리오를 다양하게 하지 못한 이들도 수입 브랜드를 찾느라 초비상이다. 해외패션 수입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비즈니스다. 소비자도 유통도 그것을 원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패션기업 입장에서는 수입이라는 기회와 투자를 통해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를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 선진 DNA를 배우고 내 브랜드에 반영해서 기업이 성장해야 비즈니스는 비로소 완성된다. 과연 지금 누가 이를 실천하고 있는가? 질문의 답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민은선 밸류메이커스미디어 대표 sophiamin2020@gmail.com]
이 기사는 패션비즈 2023년 9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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