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복 싫어! 비스포크 주자들 뜬다
개인의 주문에 따라 맞춤 생산을 하는 것.
즉 ‘비스포크 수트’라고 하면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 수트를 의미한다.
고객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직접 옷감 선정에서 디자인까지 관여할 수 있다.
*사르토(Sarto)
이탈리아에서 수준 높은 클래식 수트를 제작하는 테일러를 지칭
비스포크 시대가 열리고 있다. 대량생산으로 쏟아지는 실용적인 제품들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라이프를 즐기고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간다. 좋은 브랜드의 옷을 입는 것으로 시작한 자기만족의 욕구는 이제 상품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포커스가 맞춰졌다. 이들은 자기 자신이 하나의 브랜드라고 생각한다. 흔해 빠진 기성복을 입는 것은 자신이라는 브랜드를 돋보이게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라이프를 반영한 가치 중심의 상품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배불뚝이(?) 아저씨들만 입을 법한 맞춤 양복집은 잊어라. 한국의 비스포크 문화는 한 단계 더 진화된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신소비층으로 떠오른 20~30대를 위한 핸드메이드 수트, 충분한 경제력을 갖고 있으며 마인드 에이지는 젊은 사람 못지않은 중년 남성들을 위한 맞춤옷이 각광받고 있다.
과거 남성복의 비스포크가 소공동을 중심으로 한 단순한 ‘양장점’의 개념이었다면 현재의 비스포크는 스타일링을 제안하는 디렉터 역할을 가미했다. 컨템포러리한 감각과 내 몸에 꼭 맞는 상품을 제안한다. 가격도 합리적이다. 이 때문에 대기업 전문경영인부터 연예인, 패션관계자, 금융계 종사자, 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비스포크 수트를 만드는 신개념 아뜰리에로 발걸음을 옮긴다.
최근 청담동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맞춤 수트 브랜드 「테일러블」의 곽호빈 대표, 이태원에서 맞춤 셔츠 브랜드 「스테디스테이트」를 운영하는 안은진 대표는 뉴럭셔리 소비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1980년대생, 아직 채 서른이 되지 않은 2명의 차세대 주자는 자신들의 아뜰리에를 이끌고 있다.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전문적인 사르토*는 아니다. 수준 높은 핸드메이드 방식을 배우긴 했지만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 내는 데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이들은 수십 년간 테일러를 전문으로 해온 사르토들과 함께 일하며 20대의 젊은 감각으로 전체적인 디자인과 디렉팅을 맡는다.
디렉터 역할 가미한 新 비스포크 등장
2명의 대표 겸 디렉터는 공통점이 많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수트를 만들기 위해 한 땀 한 땀에 집중한다. 브랜드 규모를 키우거나 마케팅 등 과도한 포장을 하기보다는 상품 그 자체의 품질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빠르게 생산하고 빠르게 소비되는 패스트패션을 지양하고 자신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소수의 클라이언트들에게만 정성이 담긴 제품을 공급한다. 상품만 파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고 문화를 나눈다. 고객과 추억을 공유하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가치 있어진다.
「테일러블」의 곽호빈 대표 겸 디자이너는 비스포크 업계에서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예주자다. 5년 전 이태원에서 「테일러블」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한 후 지난 5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테일러블」의 프레스티지 라인인 와인라벨 숍을 오픈했다. 「테일러블」 와인라벨 매장은 제일모직(대표 황백)에서 전개하는 하이엔드 편집매장 겸 맞춤 수트 브랜드인 ‘란스미어’ 맞은편에 있다. 이 위치 선정만으로도 26세 젊은 청년이 대기업 자본인 ‘란스미어’에 도전장을 던진 것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럴 법도 한 것이 「테일러블」은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대기업 재벌가의 유명인사가 직접 찾아와 맞춤 수트를 제작했을 정도로 뛰어난 퀄리티를 자랑한다. 옷을 정말 사랑하는 20~30대 남성들이 「테일러블」의 주 고객들이다. 홍록기 류승범 유해진 등은 「테일러블」의 열렬한 팬이며 무한도전 200회 특집에는 김태호 PD와 함께 유재석 등 전 멤버가 직접 찾아와 맞춤 수트를 제작했다.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이들이 이 브랜드를 찾는 것은 「테일러블」에서 편안함과 수트의 진정성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곽호빈 등 20대 신예주자 다크호스로
곽호빈 대표는 “「테일러블」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내가 입고 싶은 옷’을 파는 곳이 없어서였다. 제대로 만든 옷을 적당한 가격에 파는 브랜드가 필요했다”면서 “이 때문에 직접 사르토 선생님들을 찾아가서 옷 만드는 법을 배웠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해외에 나가서 기술자들을 만나고 잘 만든 상품을 사와서 분해하며 공부하다가 「테일러블」을 런칭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핸드메이드 수트가 남성복의 끝이라고 말한다. 여자의 경우 옷을 입는 데 아름다움을 가장 큰 미덕으로 꼽고 제한이 많지 않다. 그러나 남자는 어느 정도의 툴 안에서 자기만족과 사회성을 동시에 실현해야만 한다. 절제됨 안에서의 멋을 잘 구현할 수 있는 것이 맞춤 수트이기에, 고객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화를 할 때마다 그들의 취향은 물론 버릇이나 습관까지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 모양새 하나까지 잘 관찰하고 파악했을 때 비로소 그 사람만을 위한 가장 편안한 맞춤복이 완성된다.
곽대표가 고객의 취향을 파악하고 디자인을 제안하면 3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6명의 전문 사르토들이 상품을 만든다. 수트 한 벌을 만드는 데 걸리는 기간은 3주~1개월. 고객의 사이즈를 책정해 2차례의 피팅, 옷 사이즈 수정, 체형 보정, 취향 반영 등의 과정을 거친다. 한남동에 위치한 블루라벨의 경우 재킷과 팬츠를 합친 수트 한 벌이 60만~150만원대. 프레스티지 라인인 청담동의 와인 라벨은 160만~600만원대다.
재벌가 인사부터 20대 학생까지 입는다
그는 “핸드메이드 마켓이 분명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는 게 느껴진다. 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젊은층에서 중장년층까지 비스포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유럽의 경우 하이엔드가 아니더라도 좋은 품질의 옷을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문화가 국내에도 안착되고 있는 것 같다”면서 “그런데 이를 소화하는 인프라가 한없이 부족하다. 국내에 장인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기에 머지않아 핸드메이드 상품이 엄청난 고가가 돼버릴지도 모른다”고 아쉬움을 표한다.
그는 “해외의 어떤 스타일을 맹목적으로 좇는 것이 아닌 「테일러블」이라는 브랜드만의 색깔을 갖고 브랜드 고유의 색을 지켜나가고 싶다”고 자신의 바람을 전했다. 이태원에 위치한 「스테디스테이트」는 맞춤 셔츠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브랜드다. 「스테디스테이트」를 이끌고 있는 안은진 대표는 남성복 브랜드 「브리오니」에서 바잉MD를 3년간 했다.
남자를 위한 테일러링을 늘 꿈꾸던 그녀에게 맞춤 수트는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었다. 이후 「브리오니」를 떠나 지난해 「스테디스테이트」라는 작은 아뜰리에를 차렸다. 수트는 여자로서 직접 느낄 수 없는 부분도 많지만, ‘셔츠’라면 직접 다뤄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가치 중심 세상, ‘온리원’ 상품으로 어필
「스테디스테이트」는 개인별 체형에 맞춰서 패턴을 떠준다. 실도 직접 고르고,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디자인을 제안한다. 그녀가 가장 포인트를 맞추는 부분은 ‘비즈니스를 위한 셔츠’라는 점이다. 어떤 셔츠를 입고 있을 때 더 품위가 있는지, 갖고 있는 수트에 어떤 셔츠를 매치했을 때 가장 멋스러울지를 제안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 금융계통 종사자, 패션 인사, 대사관 관계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스테디스테이트」를 찾는다. 한국인 고객이 60%라면, 외국인 고객이 무려 40%에 이른다. 미국인 프랑스인 스위스인 등 국적도 다양하다. 40만원대 후반까지 셔츠의 가격으로는 다소 비싼 상품도 많지만, 개인의 특성을 담은 셔츠가 9만8000원부터 시작하는 맞춤 셔츠의 가격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남성패션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 회사에서 윗사람이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를 아랫사람이 좇아가는 경우는 있어도 아랫사람이 입은 옷을 보고 윗사람이 그것을 따라가는 경우는 드물다. 「스테디스테이트」는 이러한 남성 패션 룰을 깼다. 한 백화점 사원이 「스테디스테이트」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그 윗사람이 「스테디스테이트」를 찾고, 또 그 윗사람이 찾아와 마침내 임원급의 점장까지 이 브랜드의 고객이 됐다. 「스테디스테이트」는 그만큼 가치 있는 상품을 전개한다. 최근에는 기업에서 단체 주문이 들어오기도 한다.
외국에서 잘 만들어진 셔츠를 보고 이를 토대로 상품을 만들어오던 국내 기성복들과 차별화된, 맞춤 셔츠로 깊이 있고 가치 있는 서비스를 위해 노력한다. 셔츠에 새겨진 이니셜은 고객들에게 자신만의 옷이라는 특별한 기분을 전달한다. 그녀는 “일본만 봐도 중년의 남성들이 유럽 신사 못지않은 패션 감각을 뽐내는 경우가 많다. 한국도 그 바람이 슬슬 불어온다”면서 “클래식에 관심이 많아 자신이 아는 클래식 지식을 구현해보고 싶어 「스테디스테이트」를 찾는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안은진, 브랜드 밸류 아닌 ‘품질’을 판다
「스테디스테이트」는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공간이 아니라 ‘가치’와 ‘문화’를 함께 논하는 공간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태원 골목에 위치한 아뜰리에 한쪽 공간은 갤러리 못지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현재 한 일본 사진작가의 작품전을 진행하고 있으며 1~2개월 단위로 작품을 교체한다. 고객들은 아뜰리에에 들려 작품을 얘기하기도 하고, 클래식 음악을 논하기도 하는 등 자신의 문화를 나누며 교감을 느낀다.
가봉의 경우 안대표가 직접 제작하고, 실제 옷을 만들 때 손바느질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바느질도 한다. 유리 벽면으로 돼 있어 건물 밖에서 그녀가 작업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이를 보고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도 있다. 최근에는 안대표의 동생이 외국 유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나가 직접 셔츠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21세의 어린 나이지만 안대표 덕분에 셔츠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녀는 “한국 남성들에게 맞춤 셔츠에 대한 인식을 시켜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
절대 맞춤복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입으면 입을수록 나한테 더 잘 맞는 옷을 찾아갈 수 있게 된다. 개인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찾아서 짚어주기 위해 노력한다”면서 “브랜드 밸류를 파는 것이 아닌 ‘품질’을 팔고 싶다. 고객에게 평생 내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최고의 셔츠를 만들어 주는 것이 꿈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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