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패션 자존심 이제 어디로…

hjsuk|09.02.19 ∙ 조회수 13,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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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패션산업의 메카인 뉴욕 가먼트 센터(가먼트 디스트릭트)가 존폐 위기에 놓여 있다. 최근 몇년 사이 집중적으로 들이닥친 부동산 업자들의 미드타운 개발붐과 뉴욕시의 가먼트 디스트릭 조닝(토지용도) 규제 약화 및 조닝 재조정 움직임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재 가먼트 센터는 지난 1910년 조성된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뉴욕 패션업계 종사자들은 위태로워진 가먼트 센터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맨해튼 미드타운에 위치한 가먼트 센터에는 수많은 의류회사의 본사와 디자인 사무소, 패션 관련 산업이 집결돼 있다. 무엇보다 미국 내 의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든 지금도 하이엔드 디자이너와 컨템포러리, 영 디자이너를 주 고객으로 한 생산라인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 뉴욕 가먼트 센터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뉴욕 컬렉션,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의 수많은 바이어를 끌어모으는 코테리(coterie) 등 트레이드 쇼, ‘프로젝트 런웨이’ 쇼에 이르기까지 뉴욕이라는 화려한 패션도시의 무대 뒤에는 거의 100년에 가까운 전통을 가진 가먼트 센터가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오랜 세월동안 가먼트 센터는 뉴욕 패션산업의 척추이자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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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파크 속해 있는 뉴욕 패션 척추
패션업 종사자들은 뉴욕에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도심 속의 유일한 가먼트 센터가 존재한다는 점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 가먼트 센터는 뉴욕 패션산업의 살아 있는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를 막기 위해 미국 패션협회(CFDA)와 의류산업 개발회사 GIDC는 뉴욕시를 상대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과연 이들의 노력이 뉴욕시와 기세등등한 부동산 개발업자들을 상대로 가먼트 센터를 지켜낼 수 있을지에 뉴욕 패션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10018’이라는 우편번호로 대표되는 가먼트 디스트릭트(패션 디스트릭트라고도 불린다). 미국의 웬만한 패션과 관련 회사들의 주소는 대부분 10018이라는 우편번호를 가지고 있다. 이름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의류회사가 맨해튼의 가먼트 디스트릭트에 몰려 있고, 매시즌 뉴욕 컬렉션이 열리는 브라이언트 파크도 가먼트 디스트릭트 안에 위치해 있다.


디자인 원단 부자재 세일즈 ‘패션의 모든 것’
패션정보에서부터 컨설팅, 디자인, 원단과 부자재 구입, 패턴, 샘플, 생산, 포장, 쇼룸, 세일즈, 패션쇼까지 가먼트 디스트릭트를 한 발짝도 떠나지 않고 의류의 A~Z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뉴욕의 가먼트 디스트릭트였다. 이곳에서는 어느 빌딩에 들어가도 유명한 패션회사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때는 빌딩 전체가 패션 관련 회사로만 이루어진 곳도 많았다. 주변의 카페 델리 레스토랑은 패션업계 종사자들의 만남과 정보 교환의 장소다. 그야말로 뉴욕 패션산업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가먼트 디스트릭트의 역사는 거의 100년에 가깝다. 1910년에 매디슨 스퀘어를 중심으로 시작돼 1920~1950년대를 지나며 수많은 의류회사와 공장·부자재·원단 회사들이 집중적으로 이곳에 자리를 잡았으며, 점차 타임스퀘어 방면으로 그 세력을 넓혀갔다. 72년 뉴욕시가 7번가를 ‘패션애비뉴’로 명명하면서 뉴욕시에는 의류산업에 종사하는 인력이 40만명에 이를 정도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후 의류의 해외 아웃소싱이 시작되면서 움츠러든 의류업계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87년에 가먼트 디스트릭트에 위치한 빌딩의 공간 중 일정 부분을 의류 생산과 패션 관련 산업에만 임대할 수 있는 조닝이 합법화됐다. 가먼트 센터가 본격적으로 명명된 것은 94년 뉴욕시가 맨해튼 미드타운의 35~41번가, 5~9번 애비뉴에 걸친 지역을 패션 비즈니스 육성지역(이하 FCBID)으로 지정하면서부터이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점차적으로 가먼트 디스트릭트의 명성이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한국과 중남미에 이어 중국 베트남 등지로의 해외 아웃소싱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Made in USA’의 위상이 줄어들었고, 큰 의류회사들은 서둘러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겨갔다. 이로 인해 일감이 줄어든 생산공장·부자재·원단 회사들은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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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역사 속 해외 아웃소싱으로 생산량 ↓
또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맨해튼의 임대료에 비해 훨씬 낮게 유지되고 있는 가먼트 디스트릭트의 사무실 임대료는 타 업종 회사들이 눈독을 들이기에 충분했다. 웃돈을 얹어주며 끊임없이 입주를 희망하는 회사들로 인해 빌딩업자들은 임대료를 올려받기 시작했으며, 안팎으로 힘들어진 생산공장과 패션회사들을 압박했다.
생산공장들은 맨해튼을 등지고 퀸스 롱아일랜드시티 브루클린 뉴저지 등지로 공장을 옮겼으며, 토미힐피거 클럽모나코를 시작으로 유명 의류회사들은 하나 둘 가먼트 센터를 떠나기 시작했다. 계속 오르는 임대료를 낼 바에야 1920~1950년대에 지어진 낡은 건물보다는 좀 더 넓고 크리에이티브한 공간을 찾아 첼시, 미트패킹 디스트릭트로 옮기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근에는 뉴욕의 대표적인 쇼룸인 ‘쇼룸 세븐’도 가먼트 센터의 7번가를 떠나 첼시의 터미널 빌딩으로 쇼룸을 옮겼다.


치솟는 임대료 의류회사들 퀸스 등지로 이주
7~8번 애비뉴 사이에 위치한 40번가에는 유명 디자이너의 철 지난 원단에서부터 레이스 가죽 모피 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은 원단을 취급하던 점포들이 즐비했다. 졸업작품을 준비하는 FIT나 파슨스·프랫의 디자인 전공 학생들, 샘플을 만들기 위해 좋은 원단과 부자재를 찾아나선 어시스턴트 디자이너, 자기 사업을 시작한 신인 디자이너들이 즐겨찾던 유명한 원단 상점들도 3분의 2 이상이 문을 닫거나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몇몇 상점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새로 지은 뉴욕타임스 본사와 딘 & 델루카, 무지 상품 스토어가 들어섰다. 10여 년 전과는 전혀 다른 40번가의 풍경이다. 38~39번가의 부자재 상가, 8번과 9번 애비뉴 사이에 몰려 있던 공장과 샘플룸 패턴 커팅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스트리트를 막고 원단 롤을 나르던 짐꾼, 공장에서 완성된 옷들을 트럭으로 옮기는 풍경도 이제는 보기드문 광경이 됐다.
FCBID는 2000년대 들어 처음으로 가먼트 센터에 패션 관련 회사보다 다른 직종의 회사가 더 많이 입주해 있으며, 이 조닝에 속해 있는 75%의 입주자들이 보호를 받는 낮은 임대료가 아닌 현 시장 시세에 맞춘 임대료를 내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가먼트 센터가 유명무실해진 것이 아니냐, 더이상 조닝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고 빌딩주들은 조닝이 불공정한 규제라며 뉴욕시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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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힐피거, 클럽모나코 등 유명회사 첼시로
규제에 따르면 조닝 안에 속해 있는 공간에 타 업종 회사를 입주시키려면 그곳에 입주해 있던 패션 생산에 할애된 공간과 맞먹는 공간을 조닝 밖에 마련해 준 뒤에 입주시켜야 한다. 그러나 뉴욕시의 느슨한 법 행정과 규제 조항의 빈틈을 이용해 공장들이 사용한 많은 공간은 이미 비 패션회사의 사무실이나 콘도미니엄으로 바뀌었다.
특히 맨해튼 웨스트 사이드의 허드슨야드 조닝이 바뀐 뒤 8번과 9번 애비뉴 사이에 밀집해 있던 의류공장들은 임대기간을 연장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가먼트 센터 내의 다른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재 남아 있는 공장과 원단, 부자재 상가들도 치솟는 임대료와 임대기간을 끝내고자 하는 빌딩주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다른 공간을 찾으려 해도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렵고, 바나 레스토랑 입주를 희망하거나 빌딩을 일반 사무실 또는 거주용이나 호텔로 바꾸기를 원하는 여러 빌딩주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생산공장은 조닝의 큰 수혜자였지만 이제는 가장 큰 희생자가 됐다.


가먼트 센터는 뉴욕 패션위크 숨은 공신
건물주 입장에서는 낮은 임대료에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공장보다 넓은 공간을 작은 공간으로 나누어 높은 임대료를 받을 수 있는 주거공간이나 사무실 공간이 훨씬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가장 두려움을 표시하는 측은 뉴욕 컬렉션에 참가하는 하이엔드 디자이너들과 중국 등지에서 대량 생산을 할 수 없는 영 디자이너, 중소 패션업체들이다.
뉴욕 패션위크가 시작되기 전에 가장 숨막히게 돌아가는 곳은 바로 가먼트 센터에 위치한 샘플룸과 생산공장이다. 뉴욕컬렉션이 열리는 2월 초와 9월 초는 유럽의 휴가철과 맞물려 있어 대부분 유럽 원단을 사용하는 하이엔드 디자이너들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컬렉션을 준비해야 한다.
짧은 시간 안에 정교한 수작업과 디자이너의 의도를 잘 표현해 내야 하는 세심한 장인정신을 필요로 하는 컬렉션 옷들은 대부분 이들의 손을 거쳐간다. 잭 포센, 두리 정, 프로엔자 슐러, 리차드 최, 피터 솜, 데렉 램, 타쿤 등 쟁쟁한 스타급 영디자이너뿐 아니라 컨템포러리 브랜드와 베라 왕, 캐롤리나 헤레라, 오스카 드 라 렌타 등 베테랑 하이엔드 디자이너들도 이들의 주요 고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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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엔드·영 디자이너와 공생관계 유지
해외에서 메인 생산을 하는 대형 업체들도 급한 샘플이 필요하거나 해외에서 받은 샘플을 보정할 때면 급히 이곳을 찾는다. 간혹 이른 시일 안에 소량의 물건을 조달해야 할 때도 가먼트 센터에 위치한 공장들은 이들에게 빠른 딜리버리를 보장해 준다. 최근에는 해외로 옮긴 상품 개발도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고 있는 추세다. ‘프로젝트 런웨이’가 뉴욕에서 진행될 수 있는 것도 가먼트 센터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어느 패션도시보다도 신인 디자이너에게 문을 활짝 열어 놓은 곳이 바로 뉴욕이다. 끊임없이 실력있는 디자이너들이 데뷔하고, 새로운 브랜드가 탄생하며, 그 힘으로 뉴욕 패션계는 늘 새로운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패션스쿨의 졸업생들과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려는 디자이너들에게 가먼트 센터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다.
리즈클레이본 존스어패럴 등이 국내 생산에 의존하던 70년대와 캘빈 클라인, 도나 카란, 랄프 로렌, 빌 블라스 등 미국의 대표 디자이너들이 패션계를 주름잡던 80년대는 가먼트 센터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국내 생산의 명맥을 유지해 주던 하이엔드 디자이너들이 유럽이나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겼으며, 대형 업체들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으로 발길을 돌렸다.


숙련가들의 노하우 = 영디자이너 생명줄
이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실력있는 영 디자이너들이 메워 주었다. 7~8년 전부터 시작된 영 파워는 뉴욕 패션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들에게 가먼트 센터의 공장은 결코 없어서는 안될 생명줄과도 같다. 가먼트 센터에서 몇십 년을 일해 온 숙련된 패턴 메이커와 샘플메이커, 봉제사들의 경험과 기술은 이들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지식을 알려준다. 신인 디자이너들에게 이들은 현장의 스승인 셈이다. 뉴욕 패션인들은 가먼트 센터가 있었기에 지금의 뉴욕 패션계가 존재·유지·발전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니트웨어와 임브로이더리를 제외하고 90%에 가까운 물량을 뉴욕 가먼트 센터에서 생산하는 디자이너 나네트 르포르는 누구보다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은행에서 5000달러(약 650만원)을 대출받아 「나네트르포르」를 런칭할 때도 회사가 1억2000만달러 (1560억원) 규모로 성장한 지금도 가먼트 센터의 공장들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며 조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상황이 급박하게 되자 CFDA와 GIDC가 ‘가먼트 센터 살리기’ 캠페인에 발벗고 나섰다. CFDA는 319명의 협회 회원들에게 사안의 중요성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으며, 뉴욕시 담당자들에게 조닝의 규제 완화에 대한 조치와 대안책을 마련해 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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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J 콥스 등 디자이너 ‘센터 살리기 캠페인’
현 뉴욕시장인 마이클 블룸버그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점도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 있다. 조닝 문제를 블룸버그의 임기 내에 마무리하지 못할 경우 조닝에 대한 이슈 자체가 흐지부지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2009년 S/S 패션위크에 참가한 디자이너들도 ‘가먼트 센터 살리기’ 캠페인에 적극 참여했다. 마크 제이콥스, 베라 왕, 랄프 로렌, 마이클 코스, 필립 림, 니콜 밀러 등 25명의 디자이너들이 안나 수이의 아이디어로 특별 제작된 ‘Save the garment center’ 티셔츠를 단체로 구입해 전 스태프와 패션쇼 게스트들에게 나눠주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안나 수이, 나네트 르포르 등 몇몇 디자이너들은 패션쇼 피날레에 직접 ‘Save the garment center’ 티셔츠를 입고 나와 인사했으며 패션쇼 전후에 참석자들에게 홍보물을 배부하며 청원서에 서명을 받기도 했다.


HBO 내셔널 지오그래픽도 프로젝트 진행
2007년 봄에 시작된 세이브더가먼트센터닷컴(savethegarmentcenter.com)은 웹사이트를 통해 뉴욕시에 제출할 패션 관련 회사들의 청원서를 접수하고 있으며, 패션 종사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또한 HBO,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 뉴욕시티 뮤지엄 등이 가먼트 디스트릭트와 관련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 앞으로 더욱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뉴욕시는 가먼트 센터 조닝을 지켜야 한다는 패션업계와 조닝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부동산 업계 사이에서 난감해 하고 있다. 그 빛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의류 생산은 뉴욕 생산업의 25%를 차지하고 있고, 1800여 개의 의류업체가 있으며, 약 2만5000여 명의 인원이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다.
매년 패션위크로 인해 창출되는 수익이 5억달러(약 6500억원)에 이르며, 다른 어느 패션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수익(470억~61조1억원)을 올리고 있는 패션업계의 원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무엇보다 ‘뉴욕=세계 패션의 중심도시’라는 근사한 이미지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주요 이슈다.


‘뉴욕= 세계 패션 중심’ 이미지 포기 못해
그러나 미국 내 생산이 급격히 줄어든 현 시점에서 20년 전에 만든 규제를 계속 고집하는 데에도 무리가 따른다. 별다른 인센티브 없이 조닝 규제 때문에 시세의 3분의 1 수준의 임대료만을 받아야 하는 건물주들의 현실적인 항의도 무시할 수 없는 실정이다.
현재로서는 60~80년대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지난 시절의 영광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미 문을 닫은 공장들의 문을 다시 열게 할 수는 없지만 100만 평방피트만이라도 지켜 현재 남아 있는 200여 개 공장들의 생명력을 이어줘야 한다는 것이 패션계의 요구이다. 조닝이 시작될 당시 1000만 평방피트를 보장받았던 것에 비하면 현저히 줄어든 변화지만 현실적인 조닝의 재조정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패션업계와 뉴욕시 모두 새로운 대안을 찾는데 집중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25~50만 평방피트 사이가 적절한 수준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지만 현재 뉴욕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뉴욕시의 또 다른 대안은 가먼트 센터를 맨해튼이 아닌 롱아일랜드시티 브루클린 브롱크스 등 외곽지역으로 옮기는 방법이다. 대신 맨해튼과 이 지역을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마련해 쉽게 왕래할 수 있게 도와 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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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패션산업 미래 달린 문제로 이슈화
CFDA의 회장인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는 조닝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장단기적 안목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갤러리나 아티스트의 스튜디오를 찾기 힘들게 된 소호나 미트패킹의 상징이던 웨스턴비프 마켓마저 애플 스토어로 변한 미트패킹 디스트릭트. 패션계는 본래의 빛을 잃은 채 이름만 남기고 상업지역으로 변한 맨해튼의 여러 구역을 보며 가먼트 디스트릭트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 아닐지 우려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에 가먼트 센터 조닝을 지키지 못할 경우 결국 생산공장은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긴장하고 있다. 가먼트센터의 부재는 곧 미국 내 생산업의 실패를 뜻하며, 다시는 되돌리지 못하는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시한다.
디자이너들은 더이상 뉴욕에서 샘플을 만들지도 못하고, 생산을 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며, 지금까지 누린 많은 이점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한다. 가먼트 센터의 존폐 여부에 따라 뉴욕 패션산업의 미래도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패션계와 뉴욕시가 해결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뷰1] 나미 구(구행남)|LB Studio + Production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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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성공 지켜보는 마음 ‘뿌듯’


구행남 대표가 프로덕션에 직접 뛰어든 시기는 5년 전 가먼트 센터의 생산공장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의류생산업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뉴욕에서의 의류생산은 이제 사양산업이라며 피해가는 길에 과감히 도전장을 낸 것이다.
구대표는 FIT에서 패턴메이킹과 프로덕션 매니지먼트를 전공하고 하이엔드 브랜드인 「할스톤」의 패턴 메이커로 뉴욕 패션계에 발을 들였다. 그 후 「할스톤」에서 프로덕션으로 영역을 넓히고 컨템포러리 브랜드인 「민트」 「제시 드 라 페미나」 등을 거치면서 가먼트 센터의 생산공장들과 인연을 맺었다.

뉴욕 내 의류생산이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구대표에게는 위기가 기회였다. 하이엔드 디자이너들은 여전히 높은 퀄리티를 보장할 수 있는 생산공장을 필요로 했으며, 유럽이나 아시아가 아닌 가먼트 디스트릭트 안에서 일하기를 희망했다. 또한 봇물 터지듯 뉴욕으로 몰려드는 재능있는 신인 디자이너들의 디자인을 제대로 된 옷으로 완성해 주고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는 실력 있는 공장이 꼭 필요하다는 구대표의 판단은 적중했다.
현재 구대표가 「캘빈클라인」 출신 사업 파트너인 에디 방과 함께 운영하는 ‘LB 스투디오+프로덕션’은 「오스카드라렌타」 「캘빈클라인」 「빌블라스」 「프로엔자슐러」 「피터솜」 「데렉램」 「배질리 미시카」 「사리 구에론」 「앨리스+올리비아」 등이 주요 고객이며, 이들의 컬렉션 샘플 본생산 등을 진행하고 있다.

구대표는 「오스카드라렌타」 「캘빈클라인」 등 쟁쟁한 하이엔드 브랜드의 실력있는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하며 하이 퀄리티의 제품을 뉴욕에서 직접 생산한다는 점을 큰 매력으로 꼽았다. 그러나 가먼트 센터 내의 다른 생산공장과는 달리 구대표는 재능있는 영 디자이너들에게도 많은 기회를 준다. 재능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영 디자이너들과 일하는 것이 쉽지많은 않다. 현장 경험이 부족하고 일손이 모자라 대부분 디자이너 혼자 일인다역을 해야 하는 이들은 공장에서 많은 것을 도와 주고 함께 완성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정성도 두 배가 든다. 그러나 영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이 차근차근 성공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뿌듯하기만 하다.

「프로엔자슐러」가 대표적인 경우다. 라자로 헤르난데스와 잭 매컬로가 파슨스를 졸업하고 「프로엔자슐러」를 런칭할 무렵에 풋내기 디자이너라고 다른 공장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이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받아준 곳이 바로 구대표의 공장이었다. 이들에게는 패션계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은인인 셈이다. 뉴욕 컬렉션 초창기 시절에는 두 디자이너가 공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함께 컬렉션을 준비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계속 「프로엔자슐러」의 컬렉션과 본생산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은 떠났지만 잭 포센과 리차드 채도 구대표와 함께 작업했으며 피터 솜과 데렉 램, 바니스 뉴욕의 핫 브랜드로 주목받은 사리 구에론은 데뷔 초부터 동고동락한 디자이너들이다. 물론 뉴욕에서 데뷔하는 신인 디자이너들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제프리 초가 비즈니스를 접었을 때는 그의 재능이 매우 안타까웠다. 또한 신인시절 함께 고생하며 인연을 쌓았지만 성공한 뒤 생산을 유럽이나 중국으로 옮기는 디자이너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들인 시간과 공을 생각하면 아쉬운 맘도 많이 든다.
구대표에게도 가먼트 센터 조닝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밀려드는 오더와 좁은 공간, 오래된 시설에서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생각하면 하루 빨리 좀 더 넓고 쾌적한 공간으로 공장을 옮기고 싶다. 새로운 임대공간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가먼트 디스트릭트를 돌아다니지만 최근 들어 2~3배로 오른 임대료와 빌딩주들의 못마땅해 하는 태도로 이사갈 곳을 찾는 일은 만만치 않다. 임대 문의를 할 때 빌딩업주들이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것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느냐’이다. 의류공장이라 하면 단번에 거절하는 경우도 많아졌으며 봉제기계가 몇 대인지, 기계로 인한 소음이 어느 정도인지 꼬치꼬치 물어보는 터에 아직도 옮길 공간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가능하면 맨해튼 가먼트 센터 내에 남는 것이 구대표의 목표이다. 외곽으로 옮길 경우 지금 누리고 있는 가먼트 센터의 이점이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패턴사 외에도 원단 부자재상들과의 긴밀하고 빠른 커뮤니케이션이 생산의 열쇠인데 이런 상황에 발빠르게 대응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을 대비해 외곽지역으로 옮기는 대안도 고심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의 원스톱 작업이 가능할 수 있도록 영역을 확장해 커팅 패턴 샘플 봉제를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하고 있다. 구대표는 가먼트 센터에 희망을 갖고 있다. 조닝이 어느 정도 확보된다면 하이퀄리티, 접근 용이성, 빠른 커뮤니커이션을 갖춘 가먼트 센터 내의 생산공장은 수요가 지속될 것이며, 경쟁력도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박스] 30년 역사 뉴욕 한인봉제협회는?

올해로 설립 27주년을 맞은 뉴욕 한인봉제협회(KAMA)는 지난 30년 간 뉴욕 패션계의 성장 과정을 함께 겪어온 산 증인이다. 한인 이민자들이 본격적으로 의류 봉제업에 진출한 70년대 이후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던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는 한인이 운영하는 공장이 뉴욕 의류 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파워풀한 세력이었다.
70년대 말 250여 곳에 이르던 생산공장이 90년대 들어서는 550곳에 이를 정도로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러나 아시아로의 생산기지 이전과 90년대 중반부터 시행된 북미무역자유협정(NAFTA)의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한인 공장들은 문을 닫거나 업종을 전환하면서 그 수가 급격히 감소했으며, 현재는 100여 개 업체만이 가먼트 센터에 남아 있다. 급변한 뉴욕 의류업계 현실을 말해 준다.
살아 남은 공장들은 하청 생산에 치중하던 과거의 경영 방식에서 벗어나 단순 봉제업이 아니라 상품기획개발 시스템을 갖추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생산자로 변신하고 있다. 또한 주력제품이던 중저가 기성복에서 벗어나 높은 기술력을 요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하이엔드 디자이너와 컨템포러리 브랜드, 영디자이너의 고품질 제품 생산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돌파구를 찾고 있다.

KAMA는 81년에 11명의 뜻있는 봉제인들이 모여 회원들 간의 정보교환 상호협조 등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 한인 의류공장 업주들이 당하는 불공정한 피해를 최소화하며,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자는 취지 아래 비영리 단체로 설립됐다. KAMA는 설립 이후 이민국 노동청의 협조를 받아 불법 체류 단속, 영주권자들의 법규 준수, 임금지불제도, 최소임금 지급, 상해보험 등 업주들이 당면한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노조와 트럭회사의 협조를 이끌어냈다. 또한 봉제기계, 부자재 업체, 공장부지 알선 및 설비까지 회원사들의 손발이 되어 의류생산업의 기반을 다지고 성장하는데 일조했다.
최근 봉제협회는 침체된 봉제업의 활성화를 위해 패션인 네트워크 구축, 차세대를 이끌어갈 패션산업 인재 발굴과 육성을 위한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뉴욕의 패션학교에 재학 중인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패션장학생을 선발하고 공장들의 협조 아래 작품발표회를 지원한다. 또한 이들이 수십년 간 다져온 패션계 인맥을 통해 학생들의 인턴십을 알선하고 업계와의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위태로운 가먼트센터 조닝의 위협에서 벗어나 좀 더 안정적인 공간 확보와 영역 확장을 위해 브롱크스에 건설 중인 한인 패션타운(원단봉제공단) 입주를 추진하고 있다. 2010년 완공 예정인 브롱크스의 한인 패션타운 조성은 미래가 불투명한 가먼트 센터에서 이미 갈 곳을 잃었거나 앞으로 2~3년 안에 임대기간이 끝나는 공장에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혜택을 주고 비즈니스를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
뉴욕시의 브롱크스 경제개발특구 계획에 맞춰 진행되고 있는 패션타운 개발 계획은 70만 평방피트에 이르는 공간 가운데 20만 평방피트가 의류 생산 공간으로 이용될 예정이며, 패션쇼 전시회 등을 개최할 수 있는 컨벤션 홀과 홀세일 매장 및 창고부지 등이 예정돼 있다. 현재 KAMA에서는 30여 개 업체가 입주를 추진하고 있다. 한편 KOTRA와의 연계 아래 미국시장에 진출하려는 한국 원단업체와 의류업체들의 입주도 적극 고려되고 있다.
KAMA는 한국 원단업체들과의 유대관계 형성에도 높은 기대감을 보이고 있다. 뉴욕 의류생산업이 기존의 단순한 하청공장 수준에서 벗어나 상품기획 개발로 영역을 확장하며 발전하는 현 상황에서 원단업체와의 정보 교환과 소재 지원은 업계 간 큰 시너지 효과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뉴욕 패션계의 화려한 무대 뒤에서 숨은 공로자 역할을 한 한인 봉제인들과 가먼트 센터를 지키기 위한 ‘save the garment center’ 캠페인에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들은 30년이 넘게 가먼트 센터를 지켜온 저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터뷰2] 존스킴 |Johnny’s Fashion Studio 대표

뉴욕패션 자존심 이제 어디로… 13565-Image



뉴욕으로 리턴하는 틈새시장 공략

조니스 패션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존스 김 대표는 가먼트 센터에서 20년 동안 의류 생산 공장을 운영한 대표적인 한인 의류 봉제인이다. 김대표도 80~90년대에는 미국 브랜드의 본생산에 주력했지만 지금은 시스템을 바꿔 상품기획 개발로 영역을 확장했다. 디자인 스케치만 있으면 패턴, 커팅, 작업지시서, 원단 부자재 공급, 샘플, 피팅, 본생산까지 김대표의 공장에서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하다. 가격대가 맞지 않아 미국 내 생산이 힘든 고객의 경우 해외의 생산공장까지 소개해 준다.
물량이 많은 미국의 대형 업체에 주력하던 고객층도 다양화했다. 지금은 브래들리 스콧, 레이철 로이, 데렉 램 등 영 디자이너와 「헬무트랭」 「띠어리」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60%가 넘는다. 「앤테일러」 「CK」 등 80~90년대 김대표의 공장에서 본생산을 하던 업체들도 김대표의 오래된 고객이다.

미국 내 생산이 주를 이루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의류 회사가 패턴사 재봉사 샘플메이커들을 고용해 자체적으로 상품기획 개발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지만 해외 생산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상품 기획개발도 해외로 옮겨갔다. 최근 들어 해외로 옮겨간 상품기획 개발이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고 있지만 이들의 니즈를 충족시켜 줄 공장이나 패턴 재봉 기술자를 찾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김대표는 바로 이 틈새시장을 공략한 것이다.

김대표는 본생산에 비해 상품개발이 까다롭고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지만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서비스 산업의 성격을 지닌 점에서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평가한다. 또한 단순 하청생산이 아닌 상품기획 개발은 앞으로 의류업체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발판이 된다. 김대표는 KAMA 회원들과 함께 단계별로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디자인과 세일즈에까지 영역을 확장해 미국 패션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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