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패잡] 김정아 스페이스눌 대표
하쉬 이야기 2탄 '협상의 관건은 돈'
패션비즈 취재팀 (fashionbiz_report@fashionbiz.co.kr)|24.03.08 ∙ 조회수 2,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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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인과 협상할 때는 거래 조건이 우리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여기서 이익이란 언제나 미니멈, 즉 돈이다. 미니멈은 오히려 그다음으로 두고 매장 수를 제한하는 등 브랜드의 이미지와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본과는 정반대다. 계약서에서 브랜드 이름을 가려도 이탈리아 브랜드와 일본 브랜드는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다.
만약 마켓 크기나 브랜드의 이미지와 관계없이 턱없이 높은 미니멈이 조건으로 붙어 있거나 라이선싱 조건이 있을 경우, 또는 말도 안 되게 높은 라이선싱 미니멈 피(라이선싱으로 물건을 제작하건 제작하지 않건 그만큼의 라이선싱 미니멈 피를 줘야 한다고 명시한 아주 드문 경우)가 책정된 경우라면 이건 100% 이탈리아 브랜드와 계약한 계약서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불공정한 계약의 한 종류다.
2012년 S/S에 처음으로 스페이스눌(Space Null)을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된 ‘하쉬(Hache)’는 두세 시즌 만에 핫해져 많은 멀티숍이 바잉하는 브랜드가 됐다. 그래도 스페이스눌은 30% 이상의 디스카운트를 받고 있었기에, 다른 멀티숍보다 좋은 가격에 하쉬를 소개하고 있었다. 또한 디자이너의 DNA를 이해하며 진행하는 바이어(나!)의 바잉도 남달라서 하쉬하면 스페이스눌을 떠올릴 정도였다. 그래서 하쉬를 바잉하는 다른 편집숍이 여럿이었는데도 무난하게 마켓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특히 갤러리아백화점 2층(당시는 갤러리아 2층이 가장 핫했다) 상행선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있던 편집숍 스페이스눌에서 하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에는 갤러리아에 얼리어답터 고객이 가장 많았기에, 브랜드 측에서도 1호점을 갤러리아에 오픈하기를 원했고 갤러리아도 두려움 없이 빠릿빠릿하게 대부분의 수입 브랜드 1호점을 론칭했다.
어느 날, 하쉬의 판매 추이를 눈여겨보던 갤러리아 바이어가 모노 브랜드로 오픈해 달라는 제안을 해 왔다. 나는 선뜻 수락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브랜드의 잠재성에는 일말의 의심도 없었지만, ‘과연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을 파트너(GFM이라는 회사의 대표 데이비드 에이거스)로 삼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브랜드를 편집숍의 일부로 바잉하는 것과 독점 계약을 맺고 파트너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와 과연 진지하고 독점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맺는 것이 맞는지 심사숙고했다.
하지만 하쉬는 나의 첫사랑이고, 디자이너 마뉴엘라의 재능은 전 세계 많은 브랜드를 보고 입어 본 내 눈으로 봐도 뛰어났다. 또 지금까지 마켓을 키워놓은 것도 아깝고, 나는 누구보다도 하쉬의 DNA를 잘 알고, 하쉬 국내 고객과 마켓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이 아이를 키운다면 그 양육법과 잠재력을 가장 잘 아는 내가 양육권(독점권)을 가져오는 게 맞는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국내 시장의 크기를 대충 알았으니 나는 미니멈을 제시했고, 그에 따르는 40%에 달하는 디스카운트를 요구했다. 그전에는 데이비드가 잘못할 때마다 5~10% 추가 디스카운트를 받아왔던 터라, 독점도 없이 이보다 작은 버짓으로 35%의 디스카운트를 받고 있었으니 40%는 당연한 요구였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가가 더 낮아져서 마켓을 더 넓힐 수 있으니, 더 많은 바잉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5년간의 버짓 계획을 들이밀며 데이비드를 설득했다. 데이비드는 모든 요구를 수용했다.
나는 그에게 앞으로 트릭이나 거짓말은 “No more surprise!”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고, 우리는 악수를 했다. 귀국하자마자 협의한 내용에 따라 계약서를 작성해서 데이비드에게 보냈고, 그는 피드백을 달아 계약서 수정본을 내게 보내왔다. 그러던 어느 날, 현대백화점 바이어한테 전화가 왔다. “대표님이 하쉬 담당하는 것 아니었어요? 그런데 ‘G’라는 회사가 하쉬와 ‘테레반티네(Ter et bantine)’라는 브랜드의 PT를 여러 백화점 바이어들에게 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테레반티네는 GFM의 또 다른 브랜드인데 하쉬보다 30% 이상 더 비싼 하이엔드 럭셔리 브랜드로, 핏이나 소재가 절대 우리나라에는 맞지 않는다. 나와 독점 계약 조건을 조율할 당시에도 데이비드는 이 브랜드도 별도의 미니멈으로 독점 진행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래도 우리는 조건에 대한 협의를 마치고 계약서 조율도 끝내고 최종 서명만 남은 단계였기에, 바이어가 전한 이 소식에 나는 어이도 없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데이비드에게 메일을 보냈다.
분명히 “No more surprise”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① 하쉬와 테레반티네를 전개하는 GFM은 불가리를 소유한 오페라에퀴티 소속의 회사로, 오페라에퀴티 지분이 80%이고, 디자이너 마뉴엘라와 데이비드 본인의 지분은 20%밖에 안 된다(이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와의 계약조건과 계약서를 오페라에퀴티 이사회에 보고했더니, 자신들에게 더 좋은 한국 파트너가 찾아왔다며 다른 파트너인 G를 지지했다는 것이다(이건 거짓이었다. G를 선택한 것은 데이비드였다).
② G는 하쉬뿐 아니라 테레반티네 역시 별도의 미니멈으로 독점 계약하기를 원한다(사실이었다).
③ G는 하쉬의 미니멈을 내가 제시한 것의 두 배를 제시했다(사실이었다). ④G는 그렇게 많은 버짓을 제시하면서도 디스카운트를 요구하지 않았다(역시 사실이었다). 매우 좋지 않은 계약조건이었다. 브랜드를 가져오고자(정확히 말하면 스페이스눌로부터 빼앗아 오고자) 하는 열망 하나로 이토록이나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조건에 합의한 것이다.
우선 ②에서 테레반티네는 매우 비싼 데다 뻣뻣한 실크나 과한 핏은 우리나라에 맞지 않는다. 재고도 처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만큼은 그냥 돈을 버리는 것이다. ③은 하쉬의 마켓을 직접 체험한 내가 제시한 미니멈이 가장 적정한데, 그 두 배를 제시한다면 나머지는 다 재고로 남을 뿐이다.
결국은 브랜드 이미지에 손상을 가져온다. ④‘No discount!’, 이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원래 우리 매장에서 80만원에 판매하던 베스트가 130만원이 된 것이다. 고객 입장에서는 한 시즌 만에 터무니없이 비싼 브랜드가 된 것이다. 결국 기존 고객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매출도 백화점 바이어들이 기대한 만큼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계약조건의 결과 G는 많은 돈을 허비했고, 고객은 비싼 가격에 하쉬를 사게 됐다. 백화점도 기대 만발이었던 브랜드의 매출에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G와 GFM의 계약은 한 마디로 하쉬 사람들의 배만 불려준 불공정한 계약이었다. 브랜드가 국내에서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그 배경과 조건 등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오로지 맹목적으로 브랜드를 가져오려고만 했기에 생긴 일이었다. 후에 데이비드는 G와의 계약이 그들에게 ‘very good living’을 가져다줬다며 내 앞에서 행복에 잠긴 채 그 시절을 회상했다.
G가 첫 번째 매장을 오픈한 후 높은 소비자가에 경악한 고객이 스페이스눌에 들러서 왜 여기서는 하쉬를 살 수 없냐며 아쉬워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나는 그들의 소비자가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다음 시즌에 데이비드를 만나 G에 디스카운트를 주라고 당부하며, 그렇지 않으면 고객들이 다 떠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이렇게 말했다. “Business is business.” G가 원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디스카운트를 줘야 하냐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것은 오판이었다. 미래의 커다란 숲을 보지 못하고, 한 치 앞의 나무 한 그루만 봤던 이들의 결말은 어떻게 됐을까. 이후 이어진 G의 급작스러운 몰락과 하쉬 브랜드의 몰락을 일으킨 믿기 힘든 사건은 다음 호에서 이어지니 기대하시길!
■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스토리(RHK)
- 패션MD :Intro(RHK)
- 패션MD1 :바잉편(21세기 북스)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현)중앙일보 칼럼니스트(칼럼제목:도스토옙스키 문학으로 본 21세기)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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