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패잡]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하쉬 이야기 1탄 ‘상인정신 & 융통성’
패션비즈 취재팀 (fashionbiz_report@fashionbiz.co.kr)|24.02.16 ∙ 조회수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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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민족이라면, 이탈리아인은 상인정신으로 완전 무장을 한 사람들이다.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같은 악덕 고리대금업자는 베니스에만 있지 않고, 샤일록적인 특성 또한 유대인에게만 있지 않다.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 등 지역적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이탈리아의 국민성은 일본만큼 독특하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탈리아의 국민성은 일본의 국민성과 극과 극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패션계에 들어와 맞닥뜨린 나의 첫사랑 브랜드 ‘하쉬(Hache)’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상아탑 속 경험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의 연속이었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 이탈리아 역사와 문화를 많이 공부했다. 하쉬 이야기에는 비즈니스 세계 속 이탈리아인의 특성이 아주 선명하게 나타나니, 이탈리아 브랜드와 계약을 맺거나 사업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주기를 바란다.
코로나19 이후 지금은 메인 트레이드 쇼의 중요성이 많이 줄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내로라하는 멀티숍의 바이어들은 길고 긴 줄을 개의치 않고 아침 일찍부터 메인 트레이드 쇼를 돌며 특이하고 좋은 브랜드다 싶으면 선점했다. 그렇게 해야 근처에 다른 숍들이 바잉할 수 없고, 대기업의 바이어들은 처음부터 독점을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0여 년 전 파리에는 RTW(ready-to-wear) 바이어라면 꼭 들러야 할 트레이드 쇼가 두 군데 있었다. 바로 랑데부와 트라노이였다. 랑데부에는 독특하고 톡톡 튀는 신진 디자이너들의 브랜드가 많은 반면 트라노이에는 이미 정체성이 확고한 ‘빅 브랜드’들이 많았다. 현재 랑데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트라노이는 코로나19로 인해 규모가 전보다 줄어들었지만 파리컬렉션 제1의 트레이드 쇼라는 입지는 유지하고 있다.
당시 매의 눈으로 트라노이를 훑는데, 옷을 달랑 대여섯장만 걸어 놓은 한 부스가 눈에 들어왔다. 트레이드 쇼의 부스 크기는 매우 작기 때문에 참여 브랜드는 고객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기 위해 대체로 옷을 빽빽하게 걸어 놓는데, 그 부스에는 기껏해야 대여섯장이 전부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하나하나가 웬만한 내공이 아니면 만들기 힘든 핏이었다. 깔끔하고 아방가르드하고, 무엇보다 독특했다. ‘얼마나 자신이 있기에 이렇게 달랑 대여섯장을 걸어 놓고 트레이드 쇼에 참여한단 말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들의 부스로 들어갔더니, 바로 근처에 전체 컬렉션을 다 볼 수 있는 모노 쇼룸(mono showroom)이 있다고 해서 직원의 안내에 따라 그 쇼룸으로 갔다. 컬렉션은 감동 그 자체였다. 컬렉션의 규모도 크고 퀄리티도 좋아서 모노 브랜드로 키워도 될 정도의 잠재력이 보였다. 그 브랜드가 바로 하쉬였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바잉하지 않았고 소개된 적도 없다고 해서 브랜드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때는 2011년 9월, 즉 2012년 S/S 바잉을 위한 것이었다. 브랜드 대표는 데이비드 에이거스(David Agus)였고 디자이너 마누엘라(Manuela)의 남편이자 인터내셔널 어카운트의 총괄이었다.
나는 데이비드와 마주 앉아 “이 브랜드가 아주 마음에 들고 한국 시장에서의 잠재력이 기대되니 처음부터 독점을 전제로 사업을 전개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그리 크지 않은 버짓을 제시하며, 내년에 이 정도 버짓을 맞출 수 있으면 독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그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그가 제시한 버짓만큼 시장을 키우기 위해 2012년 2월부터 9월까지 방영됐던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주인공이자 패션계의 완판녀인 김남주 배우에게 하쉬 옷을 많이 입혔다.
그 결과 직접 셀렉트해서 수입한 하쉬 전량이 다 팔렸고, 하쉬는 한 시즌 만에 패셔니스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다음 바잉 때 데이비드에게 나는 의기양양하게 이제 이렇게 마켓을 키웠으니 ‘약속’대로 독점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데이비드는 ‘이상하게’ 한국에서 하쉬가 갑자기 핫해지고 많은 한국 회사가 하쉬 바잉을 원하기 때문에 그 버짓으로는 곤란하다며, 원래 내게 제시했던 미니멈보다 두세 배를 더 올려 말했다.
나는 드라마에서 김남주 배우가 입고 나온 모든 사진을 다시 보여주며(이미 메일로 보낸 바 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나의 돈과 에너지와 열정을 투자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미니멈을 올릴 수밖에 없으며, 내년에 그만큼 맞추면 독점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대신에 그는 미안하다며 10% 디스카운트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두 해가 지난 뒤에는 나의 매장 바로 옆에 있는 곳에도 어카운트를 내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몰라서 실수했다고 하며 또 5% 디스카운트를 해줬다. 이런 식으로 나는 수년간에 걸쳐 하쉬로부터 홀세일 가격에서 총 35%의 디스카운트를 받았다.
보통은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는 한 테이블에 앉지도 않지만, 당시 하쉬는 패션계에서 나의 첫사랑이기도 했고, 잠재력이 매우 큰 브랜드였기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먹으면 정말 잘 키울 수 있는 브랜드였다. 하지만 제법 큰 회사의 사장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바꾸고 거짓말을 해대니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상대를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비즈니스를 이어갈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를 이해하기로 결심한 나는 이탈리아 전문가 시오노 나나미의 모든 책을 정독했고, 더 나아가 시대에 비해, 아니 현대와 비교해도 매우 실용적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마키아벨리즘에 관한 책까지 샅샅이 찾아 읽었다.
나는 그제야 데이비드의 언행과 사고방식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왕이나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며 봉건제도를 유지하는 타 유럽 국가와 달리, 이탈리아는 도시국가여서 충성·명예·명분보다는 실리를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이탈리아 역사에는 두 도시국가의 수장이 협정이나 계약을 맺고서도 병사들을 매복해 돌아가는 수장을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탈리아인의 이런 실리 최고주의는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배신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철저한 상인정신인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비즈니스 파트너를 가족처럼 대하고 실제 가족 식탁에까지 초대해 음식을 나눈다.
그래서 바잉을 가면 언제나 바잉 후에 점심이나 저녁 식사에 초대받고 정말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함께 어울린다. 정규 컬렉션과 프리나 크루즈를 포함해 1년에 2~4회를 만나 10년을 지내다 보면 가족이나 다름없어진다. 그러니 별말이 없더라도 계약이 갱신될 것이라 철석같이 믿게 된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만약 국내 다른 회사에서 미니멈 버짓을 5%라도 늘려서 바잉하겠다고 하면 이탈리아인들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간까지 말 한마디 없다가 갑자기 계약종료를 선언한다. 막스마라(MaxMara)의 국내 판권을 보유했던 코리막스(Cori Max)가 그렇게 슬픈 종말을 맞이한 대표적인 예다.
이탈리아인과 비즈니스를 한다면 무엇이든 문서화해야 하고, 문서화했더라도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해 놓는 것이 좋다. 또한 버짓에 따른 할인율을 꼭 물어보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버짓 구간에 따라 할인율이 크게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예외는 어디에나 있지만, 일반적으로 충성도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들은 비즈니스라는 이름으로 20년 지기 디자이너와 그의 직원들을 하루아침에 내쫓기도 하며, 적은 돈에도 쉽사리 신뢰를 저버리고 다른 파트너와 손을 잡기도 한다. 이탈리아인에게는 ‘신의’ ‘로열티’ ‘명분’보다는 ‘돈’을 따르는 행위가 매우 당연한 비즈니스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 모든 일에는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는 법이다. 융통성 하나만은 패션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탈리아인을 따라올 수 없다. 융통성 없이 원리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는 일본과 일을 하다 답답하면 문득 이탈리아가 생각나고, 약속을 안 지키는 이탈리아에 실망한 후에는 어떻게든 신의를 지키는 일본과의 거래가 생각난다. 또 한편으로는 외국 담당자들에게 한국은 어떤 특성을 가진 비즈니스 파트너로 보일지, 그들 입장에서 우리를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 김정아 l 스페이스눌 대표 profile
학력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석사
- 일리노이대학교 슬라브 문학 박사
역서
- 죄와벌, 백치 외 20여권
- 국내외 문학잡지에 여러 논문 발표
저서
- 모칠라스토리(RHK)
- 패션MD :Intro(RHK)
- 패션MD1 : 바잉편(21세기 북스)
- 패션MD2 : 브랜드편(21세기 북스)
- 패션MD3 : 쇼룸편(21세기 북스)
경력
- 현)중앙일보 칼럼니스트(칼럼제목:토스토옙스키 문학으로 본 21세기)
- 스페이스눌 대표이사 겸 바잉 디렉터
- 프랑스 브랜드 데바스테(DEVASTEE) 글로벌 판권 보유
- 서울대에서 문학 강의
- 패션기업 및 대학에서 패션 비즈니스와 패션MD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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