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연 한국패션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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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12.10조회수 5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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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제일모직 패션본부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제일모직은 일본의 다(多)브랜드 전략을 벤치마킹해 수없이 많은 브랜드를 갖고 있었다. 이는 국내의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은 패션산업에 대한 역사도 짧고 그에 따른 노하우도 없었으므로 이웃 선진국인 일본의 경영방식은 국내 기업에 있어서는 바이블과 같아 누구의 비판도, 별다른 대안도 없이 모방하는 단계였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어도 ‘여러 자식 중 하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다브랜드 전략은 경쟁이 치열해지고 세계 유수의 브랜드가 속속 진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수익성의 저하와 위험요소 증가 등의 문제 발생 소지가 있었다. 이러한 좋지 않은 상황에서 「브룩스힐」이라는 중저가 신사복이 출시된 후 4년 만에 첫 흑자를 기록했다. 당시 중저가 기성복들이 대량으로 생산돼 불티나게 팔리던 추세라 몇년 간 매출 이익면에서 큰 기대를 할 수 있는 사업 분야였다. 그러나 회사 전체로 봤을 때 이 브랜드의 존재가 도움이 될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한 개의 브랜드로서 흑자는 환영할 현상이지만, ‘고품질, 소량생산’의 고급 이미지를 추구하는 제일모직이라는 회사의 전통과 특성을 감안할 때 「브룩스힐」이라는 브랜드는 중저가 이미지로서 회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과는 역행하므로 전 조직원의 혼란을 야기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패션 기업은 브랜드 가치 경영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고민 끝에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하에 「브룩스힐」을 퇴출하기로 결정했다. 회사의 이미지는 생산하는 모든 브랜드들의 이미지가 모여 결정되기 때문에 전체적 방향에 맞지 않는 브랜드는 당장은 문제가 없지만 장기적으로 회사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이후 이 사건은 「빈폴」 「갤럭시」 「로가디스」 등의 고급 브랜드를 통해 제일모직을 고급 이미지로 성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선시대에는 ‘파기장(破器匠)’이라는 직책의 관료가 있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훌륭한 도예 작품은 그것을 만든 도공이 수많은 작품을 부수고 깨는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파기장이라는 관료에 의해 용도와 완성도를 검사받고 선택된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자신이 온갖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제품과 브랜드가 퇴출되는 심정은 자식을 잃은 부모와 같겠지만 폐기돼야 할 도자기가 임금에게 올려져서는 안되는 것처럼 없어져야 할 브랜드가 시장에 나와 기업의 이미지를 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모든 CEO와 경영인들은 ‘파기장’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도자기의 완성도를 엄정히 평가하는 날카로운 안목과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것은 가차없이 부수는 추진력, 그리고 도공과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는 사리분별 등 옛 선조의 자세가 한국의 패션산업을 이끌고 있는 모든 경영자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Profile

    1969년 고려대학교 문과대 철학과 졸업
    1987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1998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2005년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제24기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1969년 중앙일보 편집국 사회부 기자
    1973년 삼성물산 입사
    1980년 삼성물산 프랑크푸르트 지사장
    1984년 삼성물산 의류판매사업부장(이사)
    1996년 삼성물산 생활문화부문 대표이사
    1999년 제일모직 사장 (패션부문)
    2002년 4월~現 SADI(Samsung Art & Design Institute) 학장
    2004년 2월~現. 제8대 한국패션협회 회장
    (현)국회 섬유발전위원회 자문
    (현)한국패션비지니스 학회 고문
    (현)한국능률협회 마케팅위원회 위원장
    (현)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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